2002.12.20, 어젯밤에 보름달을 보았다. 크리스마스를 카스피해 연안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낼 생각이다. 캐비어와 청어를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캐비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스픈으로 듬뿍 듬뿍 퍼서 식빵에 질펀하게 퍽퍽 발라 보드카를 곁들여 우걱우걱 씹어 먹는 것이다.

7개월 동안 돌아다닌 것 치고는 말끔한 편. 누가봐도 처음 여행하는 사람처럼 다니고 있다. 말끔하고 친근감이 드는 거지는 도움을 받기 쉽다. 이란에 오기 전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긴 했다. 기대만큼 좋은 곳이었다. 곳곳에 'down with usa'같은 표어가 붙어 있어서 친근감이 들었다.

아프간 난민한테 시디를 선물받아서 기분이 좀 우습긴 했다. 아프간에 갈 수도 있었지만 완전히 황폐화되어 먼지만 날리는 곳에 가서 뭐하나 싶었다.

여행한지 7개월째. 여섯 번 째 모자를 잃어버렸다. 한국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심한 거리감을 느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16000km쯤 되는 거리감이었다. 16000 킬로 미터는 항공시간으로 다섯 시간 거리다. 그러니까 다섯 시간 짜리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이동에 소비한 그 많은 낮과 밤을 생각하면 최소한 해가 삼십 번은 떴다가 지는 거리였다. 보름달은 일곱 번 보았다. 보름달을 볼 때는 늘 상황이 특별했는데 늘 아연 실색케 하는 광경이었다. 거칠은 파도 위에 떠오른 달, 이국에서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 떠오른 달, 히말라야에 떠오른 달, 카라코럼에 떠오른 달 등등 총천연색 스펙타클 돌비 디지탈 시네마스코프였다.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기도 했다. 7개월중 7개월은 화장실에서 한번도 휴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단히 인상적인 회상은 아닐 듯 싶지만, 화장실의 변사에 관해 이제는 일종의 식견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전문가적인 식견. 동남아 가이들 조차 나보다 더 똥을 합리적으로 잘 싸지는 못할 듯 싶다. 아... 무슨 얘기를 한거지...

이방인이 살며시 다가와 which country are you from? 이라고 물으면 i'm falling angel from above. looking for a good man이라고 대답하는데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미셀 투르니예와 장 클로드 반담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즐거워 했다.
그 점에 관해 언젠가 투르니예에게 편지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

내가 이슬람이 된 것은 모스크에 있던 빌어먹을 놈의 농간이었다. 영예롭게도 이맘(?)이 물었다. 당신은 무슬람인가? 거짓말을 했다. 나는 무슬람이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파탄족 애꾸가 금장을 두른 두꺼운 코란을 건네주며 내 눈을 뚜러지게 쳐다 보았다.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이슬람은 기독교도를 같은 신을 따르는 형제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청결하며 2차 대전 이후 전멸했다고 여겨졌던 사나이들이었다.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사나이와 먹여 살릴 가족이 없는 사나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 점은 분명히 밝혀둬야 한다고 본다.

파키스타니가 대답했다. 닥터 코지프를 만나시오. 내가 15kg짜리 그... 핵시한폭탄을 사겠다니까. 다라 마켓에서 psg-7을 220달러에 구할 수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무기를 구하기가 정말 쉬웠다. 얼른 결혼해서 평범하고 시시하게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다가도 국제뉴스를 읽고 현실감각을 되찾으면 악의 축, 부시를 제거해서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고는 했다.

away from crow road가 return to the old and fucking good place where our ancester still lives happily forever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정이 드는 작가인 이안 뱅크스의 소설 제목이 crow road였다. rory 삼촌은 인디아를 여행하면서 두 개의 폴더를 남겼다. CR I과 CR II였다. 인생이 재밌거나, 웃기거나, 고통스럽거나, 지루한, 그러면서 지속적인 여행 상태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로리가 크리스티아니티와 문명을 버리고 스스로의 삶을 바꾸었던 까마귀 길의 세번째 파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문명권에서 실종 상태였다.

음...

아니면 미셀 투르니예와 장 클로드 반담이다.

-*-

정신이 다 얼얼해지는 뱅골만의 강한 파도를 맞은 후 무굴에 의해 도륙당했던 피 비린내 나는 역사가 적적하게 남아있는 함피를 지나 비자야와르에서 줄곧 마음 속에 담아두게 되었던 이례적인 축복을 신전의 사제로부터 받았다. 인도 최대의 IT 도시로 성장한 방갈로르에서 거리를 헤메고 화재와 번갯불로 잿더미가 되었다가 재건된 후 웨일즈의 왕자에게 패배하여 쫓겨난 비운의 마하라자 궁전이 있는 마이소르를 지나갔다. 패배한 티푸왕은 그러나 사나이였고, 마이소르는 맛있었다. 고대의 유적과 아직도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거대한 고뿌람이 있는 사원 도시들, 마말라뿌람, 꿈바꼬남, 깐치뿌람, 탄자부르, 스물 두 개의 우물에서 솟아나오는 성수로 66번 몸을 씻고 지성소에서 신의 세 가지 모습, creator, destructor, preserver를 만났던 라메스와람(사실 많은 사람들은 g.o.d 즉, generetor, organizer, destroyer를 더 선호했다), 그곳에서 수년 만에 처음으로 명상 상태에 놓였다. 마지막으로 극적인 형식미와 웅장함을 자랑하던 마두라이의 미낙쉬 사원에 이르기 까지 사원 순례를 반복했다.

종종 얼이 빠져서 사원의 사진을 찍는 것을 잊었다. 비힌두인은 출입할 수 없는 성소에 은밀히 들어가 들킬까봐 땀 흘리며 보낸 시간, 세계의 가장 높은 산 메루를 호위하는 웅장한 고뿌람, 삶이 그렇듯이 해가 뜨는 곳에 입구가 있고 해가 지는 곳에 출구가 있는 정방형의 사원들, 네 방위는 우주를 상징했다. 베다의 네 갈래를 의미하는 수천 년 전의 야자나무, 우주의 자궁 속에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성스러운 시바 링가, 회랑에는 현생에 살아 움직이는 영원한 신들의 부조가, 천정과 바닥에는 그들의 역사를 경배하는 성화가 있었다. 서쪽에 네크로폴리스는 없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다신교인 힌두 신앙의 내면을 보았던 것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도시와 평원과 바람과 무더위는 계속 되었다. 기록적인 가뭄으로 우기에도 비가 안오는 말라붙은 땅을 지나, 뱅골만과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이 만나는 깐야꾸마리에서 장엄하고 아포칼립틱한 석양을 보았다. 그리하여 석양에 관해 한 마디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오! 달이 차오르는 꼬발람 비치에서 죽어가는 해파리와 복어를 보았다. 가끔은 강한 파도에 휩쓸려 사람이 죽어가기도 했다. 여러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트리반드룸의 보행자 도로를 느긋하게 산책하고 다시 로칼 버스에 올라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고 검뎅이로 얼굴이 시꺼매지면서 피곤한 여정을 계속했다.

도시는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차 있고 갓 들어온 문명은 이내 먼지에 뒤덮인 채 시간을 먹고 있었다. 꼴람, 알레피, 꼬친을 거쳤다. 께랄라 주는 수많은 작가들의 고향이었다. 께랄라 작가들은 종종 인도의 본질 운운하는 웃기는 서구 언론의 찬사를 받아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께랄라는 인도같지가 않다. 에르나꿀람에서 5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선잠결에 성스러운 강가 강을 건너 파트나에 도착했다. 빙하에서 시작된 기나긴 강가 강은 흘러가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강은 아무렇게나 불리워도 성스러웠다.

7시간 동안 날이 밝기를 뜬눈으로 기다렸다. 안개비가 어스름한 새벽을 축축하게 빛냈다. 어둠 속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여러 대의 트럭과 버스가 나뒹굴던 도로를 지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락사울에 도착했다. 과격한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악명높은 비하르 주를 그렇게 통과했다. 사이클 릭샤를 타고 국경을 건넜다. 6시간 동안 새우잠을 자고 아스팔트의 구멍을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총격전의 흔적과 진창길, 버스의 고장, 삼엄한 군인들의 경계와 지리하게 반복되는 간첩 수사와 짐 수색을 마치고, 절벽길을 따라 12시간을 버스로 달렸다. 사람들은 철지난 이념과 국왕의 권력욕 때문에 죽어갔다. 죽어갔다. 죽어갔다.

태양은 변함없이 뜨거웠다. 히말라야의 하늘 위를 지옥의 염화처럼 태우고 있는 핏빛 석양, 96시간동안 3400km를 달리는 고통스러운 여정을 마치고 god's own country를 떠나 rooftop of the world, 또는 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들어섰다. 영원한 처녀, 차가운 세 바다가 만나는 깐야꾸마리에서 사원 순례를 마감하고, 첫 월경으로 순수함을 잃으면 여신 자리(꾸마리)를 박탈당해 때로는 창녀로 전락하는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배낭을 물어뜯는 염소 대가리를 샌달로 때려가며 포카라에 다다라 내 인생에서 한번은 꿈꾸어 봤던 그런 생활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담배 한 대 빨면서 멍하니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다가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면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강가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다가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다가 엽서 몇장 사서 근처 까페에 들러 텅빈 내부에서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아 메뉴를 고르고 천천히 엽서를 끄적인다. 밥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우체통에 엽서를 넣은 다음 숙소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창 밖의 장엄한 희말라야를 쳐다본다. 저녁 무렵에는 어떤 만찬을 즐길까 고민해본다. 오늘은 중식으로? 저녁을 먹고 입가심으로 일식 집에서 덴뿌라 한 접시에 시원한 맥주 한 잔.

다시 국경을 넘어 시체 태우는 냄새가 메케한 바라나시에서 골목길을 나흘 동안 헤메고 카쥬라호에서 인도-아리안 건축양식의 걸작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오차에서는 무굴의 성벽에 기대앉아 책을 읽다가 졸았다. 아그라에서 타지마할을 보았다. 3년 만에 델리로 돌아왔다. 여행중에 만났던 사람들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었다. 3년만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났다. 인도 여행은 이제 다 끝났다. 내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인도 대륙 형상을 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상처가 있었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더더욱 인도스럽게도) 대륙의 네 꼭지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인도를 떠나자 상처의 형태가 바뀌었다.

사원 앞에서 거지떼와, 거지떼와 별 다른 차이점이 없는 수행자, 이른 바 sadhu라 불리는 사람들이 밥통과 손바닥을 내민다. 그들의 전직과 지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인도의 각지를 방랑하며 수행한다는 점이 중요할 뿐. 그들도 밥을 먹어야 겠기에 구걸을 한다. 입구를 지난다. '거지떼'는 여전하다. 신발을 벗는다. 신에게 바칠 꽃과 기름 등잔과 버터와 과일을 산다. 웅장한 고뿌람을 지난다. 뙤약볕 아래, 발바닥을 뜨겁게 달구는 너른 마당이 나타나 인내심을 시험한다. 탄자부르의 사원은 그래서 지옥 같았다.

웃도리를 벗는다. 성수로 손을 씻는다. 때로는 온 몸에 성수를 뒤집어 쓴다. 문간을 넘는다. 문간을 밞으면 안된다. 열주를 지난다. 열주는 시계방향으로 돈다. 내부 성소로 이어지는 복잡한 길을 지난다. 지성소 앞에서 문에 달린 종을 쳐서 신들의 주의를 끈다. 그러면 자다가 깬 신들이 체통을 차리는 것으로 추측된다.

지성소의 땅굴같은 모습은 창생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의 자궁을 상징했고 그 자궁 속이나 둘레를 시바의 단단한 화강암 자지로 치장했다. 시바링가, 시바링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원은 좆 투성이다. 사원은 좆나게 큰 우주를 상징했고 신은 그 우주의 중심에 있는 요니 속에 거한다.

인사(기도)하며 지성을 바친다. 지성소의 사제가 성수를 건넨다. 마신다. 약초를 건넨다. 씹는다. 화환을 걸어준다. 목을 내민다. 꿈꿈가루를 이마에 발라준다. 빨갛다.

신의 대리자는 이러 저런 방법으로 신의 말씀과 축복을 전한다. 제단에 신에게 바칠 제물을 놓는다. 그리고 사제가 내민 접시나 도네이션 박스에 돈을 바친다. 즉, 성의껏 주머니를 털어 가진 돈을 바친다. 때로는 많은 돈을 요구한다. 생깐다. if i'm happy, god would be happy. 돈은 순전히 사원을 유지하는데 쓰인다. 하루에 4천 5백만 루피를 걷어들이는 티루파티 사원에는 어카운탄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께서 역사하시니까.

사제가 컵으로 머리를 덮어 축복해준다. 때로는 놀고있는 사제장과 언어의 장벽을 너머서 무의미한 대화를 나눈다. 지성소를 나온다. 발효되어 술 냄새가 나는 코코넛을 깨고 과즙과 하얀 속살을 나누어 먹고 마신다. 비힌두에게 금지된 여러 사원들 중 몇몇은 외국인에 대한 호의로 진입을 허용했다.

위대한 철학자 비베카난다의 정의에 따르면 힌두교도는 인도인들만이 될 수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힌두교는 괴상한 강요를 일삼는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메스꺼운 '성전'을 치르지 않았다. 베다는 브라민의 것이다. 힌두이즘은 브라민이 지배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정치적/종교적 장치였다. 민중의 신은, 하나 밖에 없는 좆으로는 부족해서 젖 짜는 여자들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희롱하는 크리슈나, 비쉬누의 화신이다. 그리고 브라민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짓밟아 파괴하는 깔리, 그리고 락쉬미와 가네샤와 하누만 역시 민중의 신이었다. 이들은 영원을 상징하는 돌에 새겨진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영원'을 상징하려면 스테인레스 스틸이나 티타늄 합금을 써서 신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무는 썩는다. 돌은 세월을 먹으며 뭉개진다. 구리는 녹이 슨다. 금은 탐욕을 부추긴다. 플라스틱은 약하다. 그래서 이제는 스테인레스와 티타늄 합금 신상의 시대인 것이다!

다신교 국가에서는 내부에서 종교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농담) 언제나 유일신 종교가 문제를 일으켰다. 지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유일신 종교는 아케나톤에 의해 이집트에서 한차례 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아케나톤은 유일신교를 만들 정도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관계로 거의 모든 이집트 학자들에게 씹히는 존재였다.

그의 뒤를 이은 투탄카멘은 아케나톤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집트 학자들은 람세스 2세 치정 무렵 모세와 아케나톤의 유일신 신앙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모세는 특이하게도 유일신 신앙을 추구했다. 그는 에굽의 신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른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시대는 단순하고 깔끔했다. 이삭의 신은 세계를 만든 후 그것들을 파괴하거나 유지하는데 있어 딱히 활동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마치 휴화산처럼.

달리 말해 창조된 세상은 방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담들은 사과 하나 먹었다고 쫓겨났다. 그 사과나무를 심은 놈이 누군가. 내 생각엔 인간을 상대로 장난질 쳤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밖에도 질투심과 분노로 똘똘 뭉친 그들의 신은 허구헌날 자신에 대한 믿음을 테스트 한답시고 설쳐댔다. 아무튼 이 세상은 신에게 버림받은 아담의 자손들이 알아서 잘 해 볼 문제였다. 모세는 석수공이기도 했다. 산에 올라갔더니 신이 번갯불로 지져서 석판을 새겨주었다. 세속적인 사람들을 위해: 또는 신의 지시에 따라 정과 망치로 재주껏 스스로 석판을 새겼다. 신의 지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매스 커뮤니케이션과 자연의 이치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는 사람들의 생활이 피곤했고 교육을 받지 못해 두려움이 많았으며 순진했고 기적을 믿었다.

무른 석회암 석판은 이집트의 서기관이 애용하던 연습장이었다. 돌은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값싼 '영원'의 재료 였으며 모세가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석판은 이집트 치정 당시에는 신의 말씀을 영구히 공고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었다. 모세는 이집트 신전 건축의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석판에 글쓰기를 연습하고 파피루스에 옮겨 적는다. 광야에서는 고급 파피루스를 구하기 힘든 관계로 모세의 신은 석판에 계율을 적어줬다. 이집트인들에게는 파피루스에 적히지 않고 돌판에만 계율을 새긴 신이 다소 검소하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싸구려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모세가 우상숭배를 거절했던 것은 허허벌판에 끌고 나온 사람들에게 신전 공사를 명했다가 불만을 살지도 몰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일곱번째 계명은 그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건대 지나치게 파격적이거나 모세의 신이 세상물정 모르는 미친놈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최소한 지난 이천년 동안 그 신의 추종자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미친놈처럼 행동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아직도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에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가 일으켰다는 기적에는 더더욱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놀랄 일도 아니지만 인도를 방문한 크리스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이 인간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어 개종했다. 그 드라마는 눈물나는 코메디에 가까웠다). 신 앞에서는 쓸데없고 무의미한 과학은 그가 일으킨 기적이 이집트의 자연현상중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넌지시 밝혔다. 유일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늘 피와 학살을 동반했다. 그 원인은 유일신이나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주장들을 한다. 그럼 다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왜 교리나 어떤 신이 잘랐다거나 신이 한 개 인지 여러 개인지 하는 문제로 싸우지 않았을까? 가령 힌두교도는 당신의 신앙이 무엇이건 간에 인정해 준다. 인정 안 하는 것은 상대방 뿐이다. 여호와는 힌두교도들에게는 늘 횡설수설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약간 머리가 이상한 신이었다. 기독교인들의 견해에 힌두인들이 동의하는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다. 그 미친놈들(신)이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심지어 이슬람도 그 점에는 동감이다. 인샬라!

평화로운 힌두인들의 인도는 독립 후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국을 괴롭혔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인도의 tv토론쇼는 종종 지나치게 과격해지고는 했다. 힌두에게도 정의는 이미 사라지고 이익이 중요해졌다... 그 평화로운 힌두인들의 인도는 독립 후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국을 괴롭히고 있다. 때로는 얍삽하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했다. 인도- 파키스탄 분쟁의 와중에 인도 총리는 테러리즘에 강경대처한다는 명분을 들어 미국에 얍삽하게 붙었다. 개나 소나 테러, 테러 하고들 자빠졌다. 독립후 갈팡질팡하던 체첸이 완전히 정신이 나가 극장에 인질을 잡고 대처할 때 부시가 푸틴을 두둔하면서 한 말이 걸작이었다. '테러는 근절되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사상 최악의 원숭이 대가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는 부시(그의 또다른 별명은 ostrich)는 러시아가 체첸에서 자행한 끔찍스러운 폭력과 학살에 대한 지식이나 견해가 전혀 없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농담)

파키스탄에 인접한 카시미르 지역은 독립을 빌미로 지속적인 분쟁상태에 놓인 채 굉장한 과부공장을 운영한다. 인도는 카시미르의 독립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면서 그 원흉으로 파키스탄을 지목했다. 파키스탄은 또한 전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인도인에게 테러리즘의 본고장으로 알려져왔다. 인도인 대다수가 인도는 평화를 사랑한다고 우겨도 이윤이 별로 안 남을 땐 입을 닦을 놈들이다. 파키스탄의 카시미르 지역에 대한 입장 내지는 정서가 이렇게 간단하다: 카시미르, 너희들의 운명은 너희들이 알아서 결정할 것. 카시미르의 경제는 이미 오래전에 붕괴된 상태이고 분쟁 상태가 끝끝내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카시미르 지역의 정치가들이 전시체계에서 얻는 크나큰 반사이익, 무정부상태와 부패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카시미르의 대다수 인구는 이슬람인데 주 정부를 운영하는 작자만 힌두다. 뭔가 핀트가 안 맞는다. 인도- 파키스탄 분쟁을 소재로 한 전쟁 영화가 최근에 개봉되었다. 두 인도 람보가 사악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맨 주먹으로 박살내는 영화인데 인도 람보는 미제 스팅거 미사일과 소련제 akm 기관총에 무수히 맞았지만 간단한 병원 치료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십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이러한 폭력과 분쟁의 원흉은 성자로 추대받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일 수도 있다 라는 것이 힌두 지식층의 은밀한 주장이다. 하지만 인도에서 간디 욕하면 맞아 죽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인도? 독립은 그렇다쳐도 비굴한 제국주의의 개 같은 국민성은 여전하다. 요즘 인도 지식인들의 고민은 그것이다: 도대체 전쟁으로 쏙대밭이 된 일본이나 한국은 잘 살고 있는데 풍부한 부존자원과 광활한 대지, 그리고 엄청난 맨 파워를 가지고 있는 인도는 18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뭐 하나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패배의식, 오죽하면 김이 샌 그들 사이에서 인도를 자랑스럽게 하는 50가지라는 어거지를 위안을 삼고 있겠는가.

파키스탄에서 들은 카시미르 사정은 전혀 달랐다. 어떻게 이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영토욕만으로 자기 땅이라고 우길 수 있는가. 하지만 그들은 카시미르의 문제를 카시미르가 해결하길 원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기특해서 돌봐주고 미국이 전략적 발판으로 삼고 있는 막강 이슬람 파키스탄 테러리스트들은 생각보다 점잖고 정치적으로 지나친 편향을 보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인도보다 시끄럽지가 않았다. 요컨대 '이슬람'을 골칫덩이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주로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무슬림식 표현대로 하자면, 시오니스트 뿐인듯 싶었다.

힌두교도는 종종 생활의 편의(?)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처럼 플렉시블한 힌두교는 양말도 팔고 소포도 붙이고 컵라면도 사먹을 수 있는 24시간 편의점 같은 종교로 보인다. 내 생각에는 인도를 개선의 여지없이 엉망진창으로 망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힌두교같다.

아프간에서 납치되어 자신을 살려주면 이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어떤 서방 여기자는 살아난 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녀는 부르카를 거절했다. 이슬람은 부르카를 벗고 현대화될 필요가 있다. 유목사회는 경제적 파탄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현대화의 조짐은 이슬람 세계에 퍼진 인터넷을 통한 서방의 타락한 문화, 소위 풍속 산업의 유입으로부터 일어났다. 섹스 산업은 인터넷 인프라를 부추기고, 인터넷 인프라는 시민들에게 입을 열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그들은 서구의 섹스 문화를 즐기면서 지하 방송이 되어 자유를 떠들기 시작했다.

원리주의자는 얼마나 원리적일까? 이맘은 코란을 해석한다. 요즘은 재해석한다. 확대 해석할 필요도 있었다. 세상이 복잡해지니까. 재해석하고 확대 해석을 자꾸 하다 보니까 짜증이 나는 관계로 가장 단순한 선택을 한다. 원리주의가 그것이다. 해석이 여럿이다 보니까 의견 충돌이 생긴다. 그래서 원리주의에는 언제나 이견과 해석의 공포로 잔뜩 짜증기가 배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는 친절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을 개코메디라고 한다.

이슬람은 신과 일대 일로 대면한다. 크리스찬과 가톨릭은 사제를 통해 신과 면접을 치룬다. 힌두는 이것 저것 다 사용했다. 지금 나는 힌두가 좋다고 말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이슬람과 크리스틴은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한다는 점이다. 알라의 첫번째 예언자가 한 말과, 여호와의 말씀을 적은 히브리 두루마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이미 신성함을 지니고 있었다. 성서는 별로 우주적이지 못한 관계로 예수 이전이나 이후의 세계에서 예수의 존재를 알 턱이 없는 수십억 우주의 지적 생명체들이 몽땅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또는 다른 우주의 지적 생명체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저지른 죄악 때문에 예수의 어깨가 백만배는 더 무거웠을 지도 모른다. 이슬람은 그점에 대해서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크리스틴 역시 성서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이슬람과 완벽하게 똑 같은 원리주의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성서에 코를 박고 있는 크리스틴과 코란에 코를 박고 있는 이슬람은 참 많이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 숭배를 몸서리를 치며 싫어했다. 게다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사고방식을 해석하는 절차가 좀 달라서(필경 귀가 어두운 누군가가 알라와 여호와의 철자를 헷갈려 적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줄곳 개죽음을 당했다.

별 이유없이.

어쩌다가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종교가 진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잘 생각 안난다. 귀찮은 과거사는 생각 안 하는 편이 낫다. 귀찮은 과거사 중에는 생전에는 무척 소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신이 없어 허전하다고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았다. 누가 생각난다고 찔끔찔끔 짜지도 않았다. 종교를 양심의 방패로 삼지 않았다. 만났던 어떤 중은 '마음단속' 이라는 핑계를 대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계집질 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거 못하잖아.' 절간은 채식으로 장수한 선사들이 죽기 전에 깨달은 것을 제대로 잘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많은 세속적인 땡중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신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신이 이렇네 저렇네 하는 사람들은 요즘 유행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올드패션이다.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에 의해 통치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아이콘이라는 독특한 상징을 사용했다. 아이콘은 근대적인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부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신앙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으니까.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에 수입되는 거의 모든 종교를 현재까지도 탄압하고 있다. 그들은 가톨릭과의 경쟁에서 그들을 몰살 시키고 여전히 살아남았다. 러시아 정교의 만행 역시 싸이코 드라마가 되어가는 중이다.

종교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수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정했다. 어떤 영화에서처럼 과학이 커버하지 못하는 미지의 분야에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하기 그지없다. 특히나 파키스탄 이슬람은 생활과 종교가 대단히 잘 일치했다. 기독교는 이해가 잘 안가는 종교다. 기독교는 삶을 백 배쯤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점에서는 모든 사안을 꼬치꼬치 기술한 마호멧 역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불교는 이제사 경전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 같아 보였다.

한 요기에게 21세기 하이테크 수행자가 어떤 놈들인지, 뉴에이지를 틀어놓고 메디테이션과 컨센트레이션과 릴렉싱과 하이퍼마인드가 어떻게 최근 추세에 맞게 진화(?) 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의 답변은 완벽하고 심플해서 심지어는 전율스럽기까지 했다;

와... 정신 사납다!

그의 방법은 여전했다. 히말라야 땅굴에 짱박혀서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그저 앉아 있는 것이 최고랄까.. 올디스 벗 구디스.

카트만두에서 시바의 초승달을 보았다. 시바의 초승달은 옴 이란 성스러운 글자에서 생각하는 마음, 움직이는 마음, 그리고 상호 작용 하는 마음 따위를 의미한다고도 말한다. 사실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도 말한다. 시바의 초승달은 그냥 온 마음의 전이 상태를 의미하면 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마음의 전이에 관해서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있는데 공통점이 저 셋 정도 될 것 같다. 옴 글자의 세 변은 각각 신의 세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 아... 나도 그들처럼 상상력을 발휘해서 궤변을 닦아둘 껄 그랬나? 시바의 초승달에 얽힌 이 모든 잡설을 종식시키는 다른 설명은 그것은 그냥 옴 글자를 쓸 때 붙는 평범한 방점과 변형된 우물렛이라는 것이다. 과중한 의미 부여와 궤변 따위로 옴은 반쯤 무너져 내린 것 같다.

그러나 히말라야를 보았다.

몇 시간 동안 무너진 산길을 타고 기어 올라가 히말라야 산골짝 깊숙이 짱박혀 수십 년을 수행한 사두를 보았다. 그의 눈은 흔들리는 등잔처럼 크고 그의 입은 늙은 언어를 말했다. 썩은 이빨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수천년 전의 산스크리트는 기괴하고 전율스러웠다. 그의 뱃가죽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으로 웃고 있었다. 절벽 자리가 그의 처소였고 불쏘시개와 깡통 하나가 전재산이다. 웃고 있었다.

최첨단 하이테크 사두란 것들은 뉴에이지와 마약에 눈이 풀려 요가 자세를 한 채 해피네스에 관한 나름대로의 해석 내지는 핑계꺼리를 갖다 붙이기 바쁜 반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미소였다. 마을에서 힘겹게 걸어 올라온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늙은 농부가 친구처럼 그에게 말을 붙이고 떠날 때 그에게 경배했다. 바바에게 하시시를 얻어 피웠다. 그가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피우고 차를 끓여 건네 주었다. 산 중턱에서 나는 왜 수행자가 되지 않기로 했을까, 기타 등등으로 아주 슬퍼지고 말았다. 산을 내려와서 존 레논의 oh my love를 오랫만에 들었다. i see the window... 아 창 밖이 아주 잘 보이는데 말이야. 눈물이 찔끔 나왔다. 며칠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인도 여행의 아무래도 지적(?) 핵심은 힌두이즘과 수행자 문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수행자들과 세속 철학을 주고받는 것으로 얘기될 수 있다. 베다는 좆도 아니었다. 힌두신앙의 오직 3%에 해당하는 브라민들이 믿는 브라만에서나 줏어 섬기는 것. 힌두의 여러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도 네 번, 각기 다른 버전을 들었다. 힌두 신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증거는 자신의 고유 버전 내지는 시스템을 만들 때라야 가능할 것 같다.

개중 사두들과 칠룸 빠는 얘기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거론하는 것만큼은 조심하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래... 그들과 하시시와 마리화나를 나눠 피우는 것이 워낙 사회 윤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조심해야겠지. 음. 음?

하여튼 진짜 사두와 제대로 대화하려면 아우라 통신이나 텔레파시 통신만이 유일한 길이다. 나야 잘 되니까 상관없지만서도. 내가 사두랑 대화 하는 모습 보면 꽤 웃기긴 한데...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즐겁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면 흠. 아무렴. 옆에서 보면 정신병자들 같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사두를 울리고 말았다. 다른 사두들한테는 망고 쥬스를 돌렸는데 한 사두 것만 빼먹었다. 자기는 왜 안 사주냐고 삐졌다. 가게에 망고 쥬스가 다 떨어졌다니까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말았다. 원숭이들과 바나나를 사이에 놓고 티격태격 다투는 중이라 바빴기 때문에 무시했다.

그중 누군가가 시내까지 한참 걸어서 간신히 망고쥬스를 사다 건네주니까 그가 헤벌쭉 웃었다. 그들과 헤어질 때 두 눈 사이에 꿈꿈 가루를 발라주며 내게 축복을 해 주었다. 사띠암, 진실의 기쁨을 누릴 것. 그것으로 내가 사두와 제사장에게 받은 축복은 세번 째가 되었다. 하지만 사두떼와 함께 있으면... 후유... 누구 말대로 유치원 한복판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원숭이한테 먹이를 빼앗겨서 기분도 더럽고... 수십 년을 수행하고 나서 망고 쥬스 하나 때문에 삐진다는게 이해가 되냐? 태연히 앉아서 죽음과 공포에 관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 작자들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아는 여성 사두는 단 한 명 뿐이다. 그녀의 별명은 허깅 마더였다. 다짜고짜 껴안는다. 그래서 안 만났다. 그녀 역시 유치원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어떤 궤변에 따르면 여성들은 깨달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뭘 깨달았는지 모르겠으나 '깨달음'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현상이라 속인에게는 기적을 통한 예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치유하는 손이나 공중에 떠오르기나 물 위를 걷거나 죽었다 깨어나기 같은 것이다. 안 그러면 그가 정말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그 자신의 문제가 된다.

더더군다나 어떤 작자는 주위에서 당신은 깨달았습니다 하니까 어? 내가 깨달은건가? 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사두들은 저 마다 독특한 개성을 자랑했다. 한 팔이 석화될 정도로 평생 들고 있거나 하는 등의 요가 자세를 취하는 사두들이 있고 벌거벗고 다니거나 자기 자지를 길쭉하게 늘려 놓아 늘어진 그것을 허리에 칭칭 감아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다니던 사두도 있었다. <-- 철저하게 인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그 거지같은 사두가 깨달음과 명망을 얻어 바바(구루)가 된 케이스에서 더도 덜도 아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기타 등등의 식상하고 밥맛 떨어지는 질문들을 굳이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그 질문을 하는 놈이 충분히 장난끼가 지나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평소 그런 피하고 싶은 의문꺼리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은 대답이 종종 궤변이 되곳하는 그런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하는데 본의 아니게도 인류는 지난 수 십만 년 동안 같은 의문을 품어 왔고 일부는 그 답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늘어놓았다. 요즘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를 통할 수 없는' 서양인들 조차 앵무새처럼 지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답변들은 tv를 발명하고 로켓을 우주로 띄워 보내는데는 별 쓸모가 없었다.

종종 그 답변이 주는 열정적인 사해동포 정신에 감격스러운 나머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을 살게 하는 힘들의 역학에 관하여.

관찰에 의해 검증될 수 없고 논리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없는 그런 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이라는 주장을 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태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과 신앙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삶의 다른 모습이 죽음이다, 생명은 존귀하다 따위의 막무가내 역시 그렇다.

생명은 왜 존귀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공교롭게도 질문의 의도를 우회한다.

생명은 존귀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답이 된다.

존귀하지 않은 것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존귀한 행동이 되니까.


내게 필요한 것은 저런 빌어먹을 궤변이 아니다. 생명은 존귀하지 않다. 생명은 흔해빠진 자연 현상이다. 사랑은 소중하지 않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 이외의 다른 생명체 사이에서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 발현되는 것을 관찰할 수 없었다. 하다 못해 인간의 사랑이란 정신적 체험의 명명이 과연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은 생명 현상의 종결을 의미한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리고 '신념'과 '신앙'으로 점철된 헛소리가 아니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는 하등 지장이 없을 따름이다.

그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지 마라. 개새끼들아.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어설프게만 여겨져 잊혀진 이론이 희안하게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눈치챈 현대 분자생물학과 수행자의 깨달음이 지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 셋은 모두 의식과 인식을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 중 그들의 생존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어떤 본능에 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께다. 성욕이나 식욕 얘기는 아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을 살게 하는 힘들의 역학에 관하여! 그것을 공포의 밑바닥까지!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 내지는 독자가 프로이트의 시스템을 오독함으로서 발생하는,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집착을 의식하는 독자 자신의 정신상태(실제로 프로이트는 성이 인간의 정신활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지 그 어디에도 정신활동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고 후기이론에 가서는 심지어 성을 '이상화'된 욕망으로 표현함으로서 에로스라면 침착함을 잃고마는 수 많은 독자를 실망시키고 심지어는 그 이론에 욕설을 퍼붓길 서슴치 않았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거나 어설픈 과학자라나?(누가 뭐래나?) 이런 실망과 욕지기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무의식화되거나 내재화된, 또는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전이와 투사인 것이다 ^^;) 등의 사소한 문제를 무시한다면 프로이트에게 여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그의 '꿈의 해석'에 드러난 고대 마술사와 전적으로 동일한 예술적/예언적/치료술사적인 재능이다. 그는 환자의 괴상한 꿈을 아주 그럴듯하게 해석하여 환자를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과 연루된 신기한 판타지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환한 기억의 회랑을 만들어 주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독특한 치료술은, 그가 자신이 철저한 과학자로 기억되기를 희망했음에도(프로이트를 정신분석해 보면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계론적인 용어, 특히 '에네르기'같은 물리적인 용어를 쓰려고 용을 쓴다고나 할까...아니면 공돌이들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해두지 머) 그가 지닌 고대 구술 예술가로서의 재능,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고대 예언가로서의 재능, 이야기를 대화 상대자에게 납득시키는 것, 치료술사로서의 재능, 환자와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통하는 그의 방법론에 입각한 고대 주술사 내지는 치료술사에 버금가는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는 현대에 부활한 주술사같은 존재였다. 그냥 내 생각일 따름이다. 프로이트적 심리치료사의 사실 상의, 그리고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철저한 실패는 프로이트 이후 이러한 극히 드문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과 장기간의 치료 기간과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 손실에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치료 효과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 약물에 의한 물리적인 정신 질환의 치료가 정신 분석보다 효과적임이 종종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요하고 점잖은 융이 프로이트보다 맥 빠지고 김새고 시시하게 보이는 이유는 융은 그냥 단순한 학자였지 치료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심리치료사들은 현대사회에서 격증하는 스트레스성 심리 질환에 포커스를 집중하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전문적으로 치료한다는 것이 참 묘하다면 묘한 일이긴 하다. 이를테면 농부가 비가 안 와서 올해 농사를 완전 작살내게 된 형편이라 엄청난 스트레스 내지는 심적 부담을 느끼는 것을 싸이코 쎄라피스트들이 치료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일을 쉬고 안정을 취하며 약 조금 타먹고 병원을 계속 다니라고? 그럴 때 하는 말이 있다.

어절씨구~ 조까고 있네~

자연 재해에 의해 인간이 받는 생존압은 일을 쉬고 안정을 취하며 약 조금 타 먹고 병원을 빼먹지 않고 다닌다는 갖잖은 방식으로 치료될 수 없는 것이고, 현대 생활은 그러한 자연의 개념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고도로 추상화된 생존압과 그러한 변화되고 복잡해진 '자연'과의 유기적 상호 작용에 대한 부적응은 사회가 자라나는 '환자'에게 적응력에 관해 무엇인가 잘못된 망상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자연으로 돌아가야 인간이 편하다는 류의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나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 바로 인간에 의해 통제된 자연이라는 점에서 역시 문명권에 속하게 된 것을 말하면서도)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 얘기는 사실 본론에서 좀 벗어난 것이고...

심리치료를 받는다면 프로이트같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과 정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툭 하면 과학입네 스트레스입네 하며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늘어놓는 현대의 싸이코 쎄라피스트들의 개소리는 듣고 싶지가 않다. 그래 그들은 분명 현대적이고 과학적이고 기적적인 치료 결과를 내놓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주 활달했던 것 같은데 어느날 책을 잡고 손에서 떨구지 않게 되었다. 소설이라면 평생 읽을 일이 없었을 것 같은데 심심할 때면 소설을 읽었다. 도대체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혹시 아무 글자만 보면 흥분하는 이상성욕의 한 사례가 아닐까?

어쩌면 프로이트 같은 위대한 이야기꾼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상상력의 지평을 뛰어넘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sf를 읽는 것이 다음 페이지에 나타나는 얼토당토 않고 유쾌하지만 때로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밤새 흥분해서 두근두근하며 뒷 일을 나름대로 궁리해 보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매력적인 시절은 갔다. 3초 전에 창틀에 앉았다가 금새 날아가버린 참새처럼.

짹짹.

그동안 '기적의 깨랄라 오이'로 맛사지 한 탓에 얼굴만큼은 보송보송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카트만두 오이'의 성능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카트만두 시내로부터 조금 떨어진 내가 거한 처소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 창틀에 창이 안 달려 있고 출입구에 문이 안 달려 있어 딱히 방이라고 하기는 민망한, 공사하다 만 건물에서 침낭에 누워 잤다. 창문은 아니지만, 하여튼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키 큰 나무에서 낙엽이 날려와 방바닥에 내려 앉으면 혹자는 이것이야말로 인공물에 자연이 가미된 조화로운 건축 공간이자 놀 줄 아는 무굴 건축의 마지막 계승이라고 감탄사를 내뱉던 곳이다.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이다 보니 밤에는 약간 추웠지만 아침에 밖에 나가 햇살을 쬐며 얼린 몸을 녹이다보면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건물에서는 일종의 작은 공동체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그들에 관해 할 말은 없다. 밥 먹고 요가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연주하고 글쓰고 파티 하고, 그런 종류의...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아직 전기가 없는 관계로 전등을 달고 전등갓을 만드는 일 따위였다. 나머지 시간에는 밥 먹고 요가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글 쓰고 파티를 했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개 짖는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개 짖는 소리 비슷한 음악을 들었다. 가끔 시내에 나가 식료품을 사거나 인터넷을 사용했다.

개천절에 한국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디너 파티에 참석해 음식을 축냈다. 양복과 드레스를 빼입은 고관 대작들 틈에서 마리화나로 나른해진 몸에 걸레처럼 꾀죄죄한 옷을 걸친 채 나보다 잘 차려입은 웨이터들을 불러 고급 와인과 온 더 락을 연거푸 마셨다. 취했다. 개중에는 왕족도 있었고 마오이스트를 학살한 장군도 있었을 것이다. 무장한 군인들이 파티장을 지키고 있었다. 차라리 네팔 정세를 모른다면 편했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 잘 안다. 땅 투기와 네팔의 암울한 현실과 권력 투쟁과 산간 벽지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학살극 따위를.

파티와 학문과 노동과 예술을 즐기는 히피가 되기에는 세속적이었다. simplest is best는 웃기는 말이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단순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맥을 짚을 수 있다면 세상과 삶은 의외로 단순한 것 일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만 단순하여 우둔한 자는 돌대가리를 시멘트 벽에 박고 있는 중이다. 단순하게 살라는 괴로운 충고를 들으면서.

이 단순한 삶은 과거를 되돌아보지도 않았고 실패를 교훈 꺼리로 삼지 않았다. 상상 만으로 웃음짓게 만드는 미래가 있을 뿐. 그래서 삶을 발견한 자들의 유골 속에서 공명하는 잠언이나, 희미한 안개처럼 신비스럽고 영속적인 도그마를 개발한 선배의 언어를 들먹이는 일이 없다.

그냥 마야꼬프스키의 싯귀처럼, 나 또한 노동과 투쟁의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자신을 세계와 현재와 연결시키려는 애절한 투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치 얘기면 환장한다는 어떤 중 아저씨와 동아시아 정세에 관해 상호 신념을 교환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동아시아 전 국가의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멈칫 닭살이 돋아났고 심지어는 계란 마저 낳을 지경이 되었다. 각 나라 고유문화의 보존 계승보다 더 심각한 얘기였다.

문화가 각광받는 21세기란 것은 대체로 어딘가 모르게 어리둥절하기만 한 것이었다. 자기들이 만든 것에 자기들이 엉뚱하게 끌려가는 희한한 유행이 요즘 문화라 불리는 것인데 매스컴의 대중 선동과 잘 구분이 안 되는 것만큼은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 덕에 블라디미르 비쇼프스키의 노래도 듣게 되었지만. 좋드만. 자신의 대가리를 품 안에 넣고 세상 참 따뜻하다고 주장하는 닭대가리가 많은데 그 점에서 만큼은 나 자신이 자유롭지도 심플하지도 못했다.

여행과 자유?

신랄하게 떠들어대기보다는 그런 쥐꼬리만한 자유조차 없었던 한국을 기억해냈다.

자유=돈이라고 온 몸으로 웅변하던 부모들이 생각났다.


알 쿠에다는 투항 후 반란군의 조직적인 수용소 살해계획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그 수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 인도주의를 강요하는 미국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밀폐된 컨테이너에 포로를 싣고 가면서 물 한 모금 안 주고 쪄 죽이는 아주 계획적인 방법을. 컨테이너 문이 열리자 죽은 시체가 생선처럼 쏟아져 나왔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시장에서는 야채와 양고기와 함께 무기를 판다. 소녀가 열차에서 강간 당하는 동안 다섯 명의 사내가 무기력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회면에나 얼핏 나타나기에는 한 국가의 변화를 지독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너무나 너무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친 놈에 관한 기사는 또 있다. 한 기독교 목사가 자기 교구에서 장사가 잘 안 되었는지 힌두인들을 상대로 설교를 늘어놓는 도중 이슬람을 악마로 규정하자 이슬람 폭도들이 힌두인들을 때려 죽였다. 인도에서 이슬람과 힌두는 그 무수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퍽 좋은 편이었다. 아니라고? 이슬람을 열받게 하는 것은 대단히 쉽다. 자존심만 살짝 건드리면 광분하니까. 파키스탄 접경의 테러리즘 활동에도 불구하고 80%의 인도인들은 대화와 평화를 원한다. 미친 BJP는 부시와 연대해서 테러리즘의 총 본산인 파키스탄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한편 실리를 챙기려 하고 있다. 이 인도라는 나라가 과연 성자들 수천을 배출한,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다신교의 국가인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가로막는 놈들이 누군가. 저런 개 같은 목사를 만든 서구 문명이다. 서구 문명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내 정열은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 내지는 악마주의의 축은 기독교라고 생각했다.

자유 좋아하고 자빠졌고, 수행 좋아하고 자빠졌다.

현생을 살아가는 참된 방법론이란 신앙을 초월한 단순철학의 실천 뿐이다.

함께 살자 라는.


파키스탄의 북부, 훈자 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걱정거리가 다음 끼니는 뭘로 할까 정도 밖에 없는 평화로운 생활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에 누운 채 4000-7000 미터가 넘는 지척의 고봉을 따라 피어나는 구름을 보다가 세수하고 밥 먹고 하릴없이 햇볕을 쪼이며 시간을 보냈다. 게스트 하우스 위치가 끝내줬다. 누워서 창 밖의 설산을 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비수기에 라마단까지 겹쳐 동네의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저녁쯤 전기가 나가면 가스등을 켜고 읍내에서 사온 등유 스토브에 불을 붙여 식사꺼리를 준비했다. 그전 오후에는 동네에서 야채와 식재료를 샀다. 다섯 시가 넘으면 라마단이 끝났음을 알리는 꾸란의 독경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마치 낮게 깔린 장작 연기처럼 동네에 나즈막히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불을 피우고 음식을 준비한다. 저녁 늦게 전기가 나가면 보름이 다 되어가는 달빛에 설산은 비인간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내가 본 것은 빛과 바람이었다.

전기가 나가면 라디오 방송조차 들리지 않았다. 비수기인 이 동네에 외국인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컬리들이 읍내를 오고가는 차 안에서 외국인은 언제나 나 혼자였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건네왔고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들이 오고갔다.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느냐 등등 장소와 시간을 묻는 질문들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 되었던 이 마을은 그러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보다는 라퓨타를 생각나게 했다. 언제 어느 때 비행석 목걸이를 목에 건 여자애가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질 지 알 수 없었고 떨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덮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빵 모자를 쓴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어린 아이의 맑은 눈빛은 지나치게 흔했다. 지금껏 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친절했고 이처럼 서로 서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옆집 가게에 주인이 없으면 대신 가게 물건을 보아주고 금고를 열어 돈 계산을 해 주는가 하면, 장례 행렬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참가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순이었다. 세계 3대 장수촌에서 두 번 씩이나 장례 행렬을 본 것은.

훈자 마을은 해발 2500 미터 위에 있다. 훈자 마을은 인도의 스리나가르, 레가 있는 카시미르와 같은 지역이라 그 나물에 그 밥인 화성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그런 동네에 사람들이 사는 것이 신기했다. 훈자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경치도 경치지만 그 지역의 제반 여건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광지로서의 훈자 마을은 이미 비수기에 들어선 상태였고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 그나마 있던 식당들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훈자 마을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4천미터에서 7천 미터에 이르는 높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고 동에서 서로 흐르는 인더스 강 줄기를 남쪽에 두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비추는 경사진 마을이다. 훈자 마을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사회다. 외부와 수출입을 하긴 하지만 근대 이전의,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덜 필수적인 생필품의 교환을 하는 수준이랄까. 그들이 외부 세계에 판매하는 것은 기껏해야 그 지역 특산물인 살구를 가지고 만든 살구잼 정도였다. 단가 당 단위무게가 꽤 나가는 물건이라 살구잼을 팔아서는 큰 장사가 되지 못한다. 주요 수입 품목은 밀, 빵(난)을 만들어 먹을 때 필요한 것.

사방이 산으로 꽉 막혀 있고 1968년 캐라코럼 하이웨이가 마을 아래를 지나가기 전에는 그럭 저럭 조용히들 살고 있었다. 전체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고 그래서 인지 손님을 후하게 접대하는 편이다. 말하자면 시골 인심을 느낄 수 있다. 몽골, 투르크, 코카서스, 라틴의 피가 섞인,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마을. 여전히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가구당 평균 7.5명의 구성원,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아들, 소 한 마리, 닭 한 마리, 고고학자 한 마리 정도다.

평균이 그렇다는 얘기고 보통 20-30명 정도가 한 가구를 이룬다. 마을의 총 인구는 7000명 정도, 마을 사람들은 서로 서로가 아는 사람들이고 목격한 바에 따르면 장례식 동안 적어도 2-300명 되는 사람들이 장례 행렬을 이루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의 구성원 전부가 서로 서로를 알고 있다고 본다. 문맹률은 거의 0%다. 파키스탄의 평균적인 상황에 비교해 보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천연적으로 외부 세계와 고립된 채 자급자족하는 작은 공동체, 그것도 최소한 천 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마을.

제임스 힐튼이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샹그릴 라를 묘사했다. 잃어버린 지평선이란, 지평선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에서 산골짝으로 둘러쌓인 엄청나게 깡촌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세어보니까 세상에는 적어도 네 개의 샹그릴 라가 있다. 네팔의 무슨 산골짜기, 중국 사천성의 무슨 산골짜기, 중국 운남성의 무슨 산골짜기, 그리고 훈자 마을이 위치한 길깃 부근의 산골짜기. 중국의 사천성과 운남성은 한동안 자기네가 진짜 샹그릴 라 라고 우기다가 공식적으로 한 성 만이 샹그릴 라라는 이름을 중국 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그곳만 샹그릴 라 라는 관광지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훈자 마을에 관한 이런 저런 머리 속에서 번쩍 스파크가 튀어 오르면서 떠오른 것이 십년은 잃어버린 단어였던 꼬뮨이었다. 이어 줄줄이 공산 이상 사회 건설과 산업화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마르크스적 소외란 것도 떠올랐다. 물론 우주 개발에 필수적인 자급자족하는 제한된 계와 99.999% 실패한 히피 공동체도 역시 떠올랐다. 이제 단 하나 남았다고 여겨지는 히피 공동체인 오로빌 역시 별다른 수입이 없어 거의 망해가다가 최근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훈자 마을은 천 년 동안 주욱 외부의 도움없이 잘 지내오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반쯤 관광지화 되고 나서부터 슬슬 변해가기 시작했다.

변화는 변화고, 매력적인 개념 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이 그렇게 지속적이고 안정된 공동체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농경 경작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대가족, 외부로부터의 고립,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생존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경작지, 약간은 가혹한 환경, 실크로드 상의 주요 경로로부터 유입된 외부인과 피가 계속 섞임으로서 사회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된 것, 국가나 사회체계, 심지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슬림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슬림의 유입 과정은 대충 짐작이 갔다. 실크로드의 대상 무역을 통해 세금 감면 혜택을 노린 상인들이 이슬람으로 전향했을 터이고 그들중 일부가 중국까지 이어지는 경로 중 이곳을 택해 현지인과 맺어지면서 피가 섞이고 일종의 인종적 다양성과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대상의 피와 인종 혼합이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켰을 것이다. 게다가 무슬림식 자비와 타인에 대한 호의, 그리고 무슬림식 위생은 더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공동 경작, 공동 재산, 이런 것들을 혼자에서 보았다. 꿈에서나 보던 '당이 없는' 공산사회였다. 매우 흐뭇했다.

당과 이념이 없는 자급 자족 공산 사회.

-*-

추워지고 있다. 동방견문록을 본따 다음 이야기의 목차를 정해본다.

'여기서 그는 어떻게 거대한 사막을 건너 페르시아로 가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6000년 전의 고대도시에 살고 있는 펭귄의 신기한 습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사파비드 왕조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왜 무슬림이 되었는지, 어떤 이름을 얻었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제 2차 이슬라믹 레볼루션을 예언한다'

알라는 누구에게나 능력 이상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셨다.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질의 일곱 천당 꼭대기에서 가브리엘은 마호멧에게 직관을 논한다. 읽어라. 읽어라. 네 몸을 읽어라. 그래서 가브리엘은 흔해빠진 여느 닭대가리들과는 달리 뭘 좀 아는 짱급 조류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화두. 제자의 기쁨. 아난다의 아난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하기. 그중, 입에 난 상처를 치료한 후 바르게 말하기.

penny saved, penny earned. -- 절약정신!



예산 문제 때문에 길에서 휘청거렸지만 신화서점에서 요리책을 게걸스럽게 찾아 헤멨던 것은 맛을 향한 집념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두번째 어리석음을 이제와서 생각해보건대 카마, 또는 쾌락에 대한 우둔한 집중을 반드시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화기를 양념으로 사용했다.

한국인들이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코리안더와 타마린드와 후추와 고추가 버무려진 사천의 기름 속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며 깡총깡총 춤을 추는 재료들. 요리사의 개성만큼 각기 다른 노란 양념 불꽃과, 가가호호마다 50여종의 향신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독특한 인도 커리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인도 커리가 그래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음식인 것은 오미중 네가지 맛을 한꺼번에 낸다는데 있었다 -- 옛날에는 커리의 노란색을 내는 사프란 1g이 그 무게 나누기 2의 금값을 치뤄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야채와 고기에 너울거리는 불꽃이 '인'을 짓는 동안,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불꽃에 도취된 채 마지막 식사를 가졌던 그날 저녁의 노천 식당을 특별히 기억했다. 외로움을 느꼈다. 이 많은 요리를 함께 나눌 모험심에 가득찬 파티 맴버가 없다는 것, 헌드레드 마일즈를 흥얼거리면서 값싼 여정에 값비싼 음식을 포식했다. 돈은 아깝지 않았다, 돈은 줄곳 아깝지 않았다. 영혼은 책과 말씀으로 살찌우고(웩!) 비유컨대, 무엇으로 채워도 부족한 영혼과 달리 생생하게 와닿는 육체의 허기는...

그래서 지폐로 배를 채웠다.

3개월이 지났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탄도리 치킨과 머시룸 수프를 먹었다. 그래서 398 루피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기쁘다. 행복하다. 지금은 맛을 향한 예지, 맛의 통찰에 도전하고 있다.

밤낮으로 하시시를 빠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지혜 마저 가지고 있었다. 아름답거나, 평소에는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던 희안한 풍경은 감각과 이성을 약물로 예민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놓지 않아도 그 자체 만으로 시시각각 즐길만 했다.

'까마귀 울음 소리와 함께 상쾌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햇살이 묵고 있는 방 앞을 환하게 비추었다. 방문을 활짝 열어 믿어지지 않는 강도로 마당을 비추는 질량 제로의 광자를 꼼꼼히 세어 보았다.' 아침에 깨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으니까. 갈 데도 없고...

오버차징으로 등골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케세라세라를 입에 달고 다녔다. 다리에서 만난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과의 대화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던 어느날 오전(날짜 감각이 없는 관계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담배를 물었다. 간밤에 불어온 비바람에 그가 정성스레 재배하던 해바라기는 목이 꺾여 있었다. 해바라기의 목이 부러지자 그는 상심했다. 그는 전날 밤 나에게 상추를 주었다. 맛있던 상추가 생각나서, 다른 이에게 줄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문득 알았어요 라고 말했다.

난 너한테 상추와 고추를 줄 수 있어. 그래서 울컥 치밀었다. 어떻게 3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줄 상추 이파리 한 장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 없을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줄 상추를 재배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철학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만일 그 사람이 상추는 필요없다고 하면 어쩌지?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무우를 주면 되잖아. 그렇다. 무우가 있었다. 이런 것은 책에 잘 안 나왔다.

테루의 이야기가 시작될 무렵, 그들이 주고 받은 대화는 용과 인간의 분리에 관한 전설이었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에게 줄곳 다소의 경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현실에서 무언가를 대체하는 대체물임을 철 들고 나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르귄은 글자가 주는 장엄함을 얄팍하게 우려먹었다. 모험과 역경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삶의 위대함이라는 것도 있다는 둥. 글자는 본뜻과 신체가 같은 맥락을 유지하고 있을 때라야 빛이 나는 것 같다. 달리 말해, 돌대가리의 아무리 잘쓴 글은 시시껄렁 하다는 것이고, 모험심이 없는 세상은 늘 50% 부족할 수 밖에 없다는 점 등등.

명사는 신을 위한 것, 동사는 인간을 위한 것.

두고 두고 생각해 볼만한 말이다. 그 말이 맞아 떨어지는 특정한, 그러나 광범위하여 이 시대에는 구차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어진 지배 조건이 있었다. 때가 되면 어떤 사람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욕설과 배타적인 거부가 아닌 불 필요한 사족을 싹둑싹둑 잘라내는 진중한 반성을.

반성은 비용이 안 들어서 좋다. 반성은 또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관계로 추천할만 하다. 반성은 종종 각을 얻은 이 조차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로 얽힌 세상은 복잡하니까.

accidents will happen -- 호사다마!



호치민에서 앞니가 나가고 길바닥에 엎어진 순간 데자부를 보았다. 이빨이 제 위치에서 빠져 팜 구라오 거리의 아스팔트 바닥을 통통 튀어가는 동안, 안경은 구겨지고 얼굴과 팔 다리에는 무수한 상처가 남았다. 입에 피를 머금고 속으로는 낄낄 웃었다. 액땜이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익숙했다. 예정된 사건. 게스트 하우스에 쳐박혀 붓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나흘을 꼼짝않고 지냈다. 실링 팬이 덜그렁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동안 창 밖으로는 우울한 스콜이 수 차례 지나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나흘 동안 세 번 들렸다. 우유와 오렌지 쥬스와 여덟권의 책을 먹었다. 그리고 이빨 하나와 도난당할 뻔한 작은 가방을 저울질 해 보았다. 이빨 하나쯤 없는 편이 편했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는 기쁘기까지 했다. 빠진 이빨 사이에 담배를 끼우니까 꼭 들어맞았다. 게다가 입을 활짝 열고 웃을 때는 더 이상 악어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쪼다같아 보였다. 쪼다는 내가 지난날 찾아 헤메던 어떤 정신상태와 일치했다.





물론, 데자부는 한 번 뿐이 아니었다. 운명을 잡아당기는 곧은 실은 어느 시점에서 각을 접고 들어갔고 그래서 위험이 지나갔다. 두번 째 데자부는 거진 유체이탈의 신비를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 장소에 와 본 일이 있었다. 나는 이 고개를 넘었을 때 어떤 풍경이 펼쳐질 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은 거기 놓여 있었다. 시간 상으로 이 장소에 온 것은 앞으로 수백 년 후의 일이 될 것이다 등등.

길에서 만난 아저씨는 이곳으로 인도하는 길 중간쯤 누군가가 목이 잘려 죽었다는 전설같은 얘기를 늘어놓았다. 전조는 그것이었다. 길에서 만난 어떤 사람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던 일. 이제는 데자부에 심한 전율을 느끼지 않았다. 50억장의 슬라이드를 겹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놓은 것 같은, 불행한 세계였다.

4200m의 산중에서 우박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다가 다 쓰러져가는 산막에 들어갔을 때 노인은 버터차와 술을 주었다. 밤에 무슨 재밌는 짓을 했는지 꾀죄죄한 애가 셋이나 되었다. 야크티는 공포심을 잊게 해 주었다. 야크티는 남의 인생들 만큼 따뜻하고 느끼했다. 새끼 손가락 만한 우박을 머리통에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맞는 결과 가끔 골치를 썩이는 각종 형이상학이 사실은 쓰레기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런 것을 산중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주위 사람들은 우박을 머리에 안 맞아도 진즉부터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맞으면 더럽게 아프고 썰렁한 우박을 피해 산토끼처럼 품위없이 팔짝팔짝 뛰는 동안(소용없는 짓이다), 살기 위해 제대로 발버둥쳐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동해안에서 폭풍우 때문에 차가 뒤집혀 덮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파도에 맞아 뒤로 날아가는 동안은 그나마 즐겁기라도 했다.

눈 녹은 물로 얼굴을 씻는 순간 골이 얼얼했다. 고개를 들어 잔인하게도 아름다운 풍경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그때는 반쯤 미쳐 있었다. 내가 코윈이라고 생각했다. 산속에는 나 밖에 없었고 길 잃은 산양이나 야크처럼 아무데나 소변을 보거나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똥을 싸고 잎사귀로 닦았다. 눈부신 별빛 아래서 똥을 싸본 적이 있는가?

개척자, 탐험가의 삶에는 독특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영생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얻은 댓가는 간단했다. 처녀성이었다. 종종 나는 처녀성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반대 급부로 재생산 내지는 우려먹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담백한 삶에는 많은 말이 또는 생각이 필요치 않았다.

18m의 바닷속, 산호 쪼가리들이 무릅을 찔렀다. 허파에 공기를 채우면 뜨고 공기를 내뱉으면 가라앉았다. 물고기처럼 중성부력을 유지하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상처는 3주가 지나도 낫지 않았다. 두통, 몸살, 개미들이 물어뜯은 상처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밤낮으로 부스럭거리는 도미토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로 대피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여행자들이 모인 저녁은 생각만큼 유쾌하지가 않았다. 얼굴 상태가 영 말이 아닌 미국인 여자가 자신이 댕기열에 시달렸으며 한달여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안 보여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 간다고 말했다. 앞에 앉아 있던 남자 역시 댕기열 환자였다. 댕기열 치료제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옆에는 말라리아를 앓아본 경험자들이 수두룩 했고 이름을 알 수 없어 그저 자신은 열대병이라고만 하던 불길한 환자도 있었다. 하찮은 산호독은 끼일 자리가 없었다. 여행지 각국의 병원은 한번씩은 다 들러봤다는 이력이 큰 자랑꺼리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3개월 이상은 린넨 침대 커버를 더럽혀 본 노련한 환자들이었다. 뱃속이 거북한 관계로 시급히 그동안 걸렀던 회충약을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18m의 바닷속을 헤메는 것은 그렇다치고 수영을 못할 뿐더러 제대로 떠 있지도 못하는 사람을 파도가 치는 물 속에 10분을 방치해 두는 scuba 라이센스의 마지막 실습 과정은 평생토록 유지했던 우아함을 처참하게 망쳐놓기에 충분했다. 한 바가지의 물을
마시는 동안 진정한 마초라면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그 말을 적어도 열 번 이상, 볼쌍 사납게 내뱉었다.

HELP ME!

(이성이 남아도는 관계로, 그 와중에도 다들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말했다)

advise with your pillow -- 심사숙고!



촛불 아래에서 하시시를 돌려 피웠다. 흔들리는 촛불 옆에서 그는 힌두의 창세 신화를 설명하고 있었다. 새로운 버전이었다. 촌부조차도 자기만의 창세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바닷가의 축축한 바람에 빨래는 통 마르지 않았다. 베란다의 긴 의자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떠나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어떤 것은 없었다. 인연은 길게 요동치고 갈 길은 멀기만 했다. 시간은 과연 우주의 생성과 함께 시작할만 했다.

인문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뻔뻔하게 주장하지만 이음새가 없는 자연스러움을, 또는 전이를 주도할 하이브리드형 사이보그는 이 시대에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윤기가 이 시대를 일컬어 '무통분만의 시대'라고 했을 때, 동구 밖에서 자리 펴고 앉아있던 노인네 둘이 박정희 시절이 좋았지... 하는 얘기를 늘어놓는 것과 별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잔류 적군파는 발악하면서 이런 성명을 냈다.

우리는 내일의 조다!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그 시대의, 빨지산 구닥다리 확성기였다. 이윤기를 곱씹자면, '애들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그걸 적당히 기름칠을 하면 '무통분만의 시대'가 된다. 이런 류의 인문주의는 적당히 파란만장하게 시대를 풍미했던(?) 나같은 인간쓰레기에겐 메스꺼운 기름덩이에 불과하다. 기름덩이, 이윤기 글의 느끼함은 백만톤의 돼지기름에 견줄만 했다. 그런 인문주의 시대라면 사양이다. 뒈져라~

왕도사 이야기는 이것으로 세 번은 들어본 것 같다. 몸소 언급하기까지 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고고학적 유물에 관한 전 시대의 강탈이 온당한 것인가 하는 류의... 타오르는 불꽃이라 이름 붙은 도시에서(그리고 그 도시의 글자는 내 이름에도 들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타오르다인지 불꽃인지 늘 헷갈리지만) 서구인에게 농락 당해 수천 권의,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문헌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중국의 문인들을 비분강개하게 했던 웃기면서도 구슬픈 이야기가 지닌 이중성을 생각했다. 피터 홉커크가 쓴 실크로드의 서양 악마들은 저자보다는 역자가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의 견해에 동감했다. 이렇게 읽을 책이 늘어간다.

어떤 코미디언이 쓴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글을 읽었다. 그 글중에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100미터가 넘는 마른 강의 절벽에서 번지 점프를 하는 어린 학생들에 관한 얘기가 있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들이란, 나라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아서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뭐 그런 류의 얘기였다. 한국인 여행자들은 여행을 참 잘한다. 한국에서는 아침 열시에나 일어나 대충 수업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밤이면 끼리끼리 모여서 술이나 마셔대는 놈들이 외국 여행 할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 빨빨거리며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한푼이라도 아껴보려고 인상 긁으며 가격협상을 하고 가장 싼 속소들을 찾아 다니고 안되는 언어로 어떻게든 현지인과 백인들과 얘기하려고 애 많이 쓴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도 마리화나를 입에 대지 않고 한국인임이 쪽팔릴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등등.

생각해보니까 나도 한국인의 좋은 면을 보여주려고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언제나 공명정대하려고 하고 현지인들 등을 심하게 등 쳐먹지 말아야겠다고 자제하는 것도 그렇고... 흠. 그 코미디언의 견해 중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민간 외교사절 노릇을 한다는 얘기에는 별로 공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그러는 것은 비좁아 터진 사회에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다감해진 한국인들이 뒤에 올 자신과 관계된 멀지않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던가 하는 이유일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이 정이 많고 다감하다는 정도인데 그 말이 입에 발린 말이고,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대체로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니었다. 한국인은 어쩌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치가 기가 막히게 발달하고 정서적 공감을 형성하는데 타고난 재질을 갈고 닦은 민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비좁아터진, 사람들과 부대끼어 자기주장을 삭여야 하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임어당이 중국인을 자화자찬하던 정신병자같은 얘기와 그닥 다르지 않아 입맛이 쓰다.

oath and egg are soon broken -- 달걀깨기!



인도에 도착하여, 3주 동안 두 번은 오토릭샤를 공짜로 얻어탔다. 기록갱신이다.

지금은 유럽 갈 생각이 사라졌다. 가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총 여행 경비의 1/3 가량을 쓰고 장기체류하면서 서구 예술을 음미해보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은 유럽이 내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쪽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을 남모르는 눈물과 땀을 흘린 열대 속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팬더가 되어 있었다. 천적이 없는 팬더는 자기 인생의 3/4을 먹는데 소비하고 남은 1/4중 3/4을 자고 쥐꼬리만큼 남은 그중 1/4을 먹을 것을 찾아 다니는데 사용한다고 말했다.

남은 소주를 다 먹어 치우고 간신히 남은 한 병을 건네 주었을 때, 또는 2개의 컵라면을 다 먹고, 도네이션 받은 디스를 몽땅 피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고픈 표정으로 왜? 라고 물었다. 왜냐면 내가 그것들을 혼자 먹지 않고 나누어 먹으리라 생각하면 내 자신이 불행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다.

코스를 다 뜯어 고쳤다. 이미 여행의 목적(사랑과 모험)은 사라졌다. 여행도 사라졌다. 생각도 사라졌다. 인생의 특정기간 동안 줄곳 나를 괴롭혀왔던 두 가지 문제, 빨래줄에 널어놓은 린넨 침대시트처럼 안팍이 깨끗해졌으면 하던 바람이 뜻대로 해소되고 심플 마인드라는 포레스트 검프적 정신상태에 도달하여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언어와 지식으로부터 등을 후련하게 돌리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 걱정 근심 없는 아난다 상태가 되자마자 근심걱정은 사소하고 시시한 문제로 귀착되고는 했다. 오늘은 뭘 먹지? 같은 것이었다.

그가 방콕을 떠나기 전, 몇번인가 졸라 그가 애지중지하던 가방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율을 느꼈다. 도굴꾼-고고학자-인디애나 존스를 짬뽕한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정체불명의 장소에서, 알 수없는 방법으로, 목숨이 오락가락 하면서 습득한 400-800년전의 산스크리트 고문서를 보았다. 펼쳐보는 동안 소름이 오싹하게 끼쳐왔다. 히나야나의 전래을 보전하고 있는 불경이었다.

한 때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로 세기말 희극을 연출하던 성철이 있었다. 주장도 희극이었지만 공방도 희극이었다. 거개 당사자들의 변명은 몹시 애절해서(돈오돈수를 이해하는 과정의 난해함 내지는 지면 관계상 학문적 배경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애석해하며...) 더더욱 오만가지 풍미가 느껴진다. 성철은 그래서 웃겼다.

웃기는 정도로 따지면 백남준 못지 않았다. 여전히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그의 주도면밀한 사기극이었을 꺼라고 믿는 편이다. 그는 비디오아트같은 개쓰레기를 보여주기 전에는 스스로 아무리 예술 팔아먹는 사기꾼이라고 말해도 천재 같았다. 비디오아트를 비싼값에 처분할 정도면 못해도 천재 사기꾼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성철은 그저 그래도 백남준은 존경스러웠다. 왜냐면, 성철의 쇼맨쉽은 상당히 멍청해 보이던가, 아니면 추종자들이 만들어 놓은 성철이란 비극적인 환상 때문일런지도.

묵고있는 파크랜드 호텔의 레스토랑은 왠간한 식도락가를 흡족하게 만족시켜 줄만한 상당한 실력의 요리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레스토랑에 느끼는 자부심은 메뉴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Parklane is Parklane.

여행 경험이 별로 없어 파크랜드 호텔 레스토랑의 존재를 모르는 성철이 만약 맛의 의미론을 이해하고 맛의 형이상학과 맛의 도를 아는 사람이었고, 그가 그 레스토랑을 방문해서, 간단한 필라프 마저도 문턱을 넘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절학의 곡예 솜씨와 비범함을 선보이는 그 요리를 냄새맡고 혓바닥에 얹어 보았더라면, 그가 했어야 할 말은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파크레인은 파크레인이다.

돈오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성철은 성철이고 조계종은 조계종이다.

18m의 바닷속은 무언가 달랐다. 물고기를 쫓는 동안 등을 하늘로 향하는 평범하고 시시한 자세는 드라마틱하게, 그러나 천천히 변해갔다. 나는 어느새 옆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집혔다. 파도를 따라 햇살이 커튼처럼 너울너울 흔들렸다. 강한 조류에 밀려갔다. 중력과 부력의 미묘한 균형상태, 중성부력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속에서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느낌은 충격적이었다. 무중량 상태에서 본 빛의 커튼은, 이틀만에 30여 만원을 날린 것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게 했다.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개는 생각한다. 소도 생각한다. 사람도 생각한다. 물고기는 생각하지 않는다. because they just know.

all arts grow out of necessity -- 불요불급!



사진 찍기는 날이 갈수록 잘 되었다. 수평이나 황금비가 잘 맞았고 프레임에 가두면 사진기가 알아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내 탓은 아니었다. 면 분할은 아직 서툴렀다.

그러다가 성공했다. 성공했지만 찍은 것보다 놓친 것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 빛이 문제였다. 빛은 항상 부족했다. 2000장이 넘는 사진중 잘 쩍었다고 생각하는 사진은 열 장이 넘지 않았다. 그중 2/3 이상을 버렸고 나머지는 평범하고 진부했다.

사진기가 점점 보기 싫어졌다. 내 자신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이기였다. 찍은 사진들은 이제 간신히 엽서용 사진을 넘어서는 정도였고 엽서용 사진은 비웃음 꺼리 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기에 대한 통제력이 내게는 없었다. 차라리 수동 카메라라도 하나 사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건축물에 대한 시선이 예민해질수록 지엄한 신성과 권위에 대한 이질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앙코르 와트의 메루산을 오르는 수직 계단은 오로지 오체투지하듯 네 발로 기어 올라갈 수 밖에 없다.

귓가가 앵앵 거리도록 내게 말을 걸어오던 앙코르 와트의 부조 회랑은 압도적인 스케일로 여러 권의 책 전 페이지를 나열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거의 넋을 잃었다, 소름이 돋았다, 턱이 쩍 벌어졌다. 읽는 속도는 어쩔 수 없이 불규칙했다.

반쯤 열에 들떠서 정과 망치로 만든 그림책을 수 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완벽한 각도를 얻었던 어떤 특정 지점에서 빛과 바람을 보았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보았던 어떤 사람도 내가 보았던 빛과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저녁이 되면 수백 년 전의 폐허 속에서 씁쓸한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사진에는 셀 수 있는 빛이 없었다. 그래서 사진기에 무의미한 욕설을 늘어놓았다.

함피의 유적지나, 앙코르와트나, 자금성을 보면서 가끔은 가슴에 통증을 느끼곤 했다. 인류사에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위대한' 건축물에 관해, 세계의 고건축에 정통한 건축학 관련자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첫번째로, 그 당시 그들이 건물을 지을 때 정성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런 개 같은 부실 공사가 어째서 온갖 종류의 제국주의자들의 알량한 예술론에 의한 찬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두번째는, 건축과 권력에 관한 것이다. 수백, 수천년이 지났건만 위대한 건축물에서 흘러내리는 인민의 피를 늘상 보고 있었다.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홋날의 감상자들과 건축 전공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었는지. 세번째는 양식론에 관한 것이다. 양식론 말고 건축물을 묘사하는 좀 더 직설적이고 세련된 표현방식은 없는 것인지. 양식론은 확실히 건축물에 엿보이는 당시의 문화가 지닌 독자성을 사정없이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번째는 과학적, 기술적으로 냉정한 분석을 듣고 싶다. 그런 것은 '관광 팜플렛'이나 '가이드북' 따위에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어느 책을 봐도 예술적 가치와 연대기를 장황하게 떠벌릴 뿐. 의문은 의문으로 남기고, 팔미라에 뜨는 초승달을 보고 싶다.

8월 26일 마하라자의 궁전을 보았다. 줄곳 론리 플래닛을 읽었지만(지금까지 대략 16권?) over the top 따위의 무리한 표현을 동원하지 않던 이전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찬사를 바친 건물인데 이모저모 뜯어봐도 그것을 개축했다는 어윈이라는 영국 건축가의 '작품'에는 그저 그렇다 정도의 평가 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건축물의 전이 공간에 관해 열띤 언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내 기본적인 견해는 영국의, 특히 열대 식민지에서 흔하게 보곳 하던 빅토리안 양식의 건축물 만큼은 무슨 짓을 해서 짓든 형편없다 라고 생각하는 편. 함피의 900년 된 폐허 중 사제관으로 짐작되는 어떤 곳은 현지인이 외양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딱이었다.

care's no cure -- 감정자제!



우기가 밀어닥친 뿌리에서 지랄같은 옴나마 시바야 만트라 소리에 잠이 깨었다. 새벽 다섯 시였다. 인도에 도착한 후로는 팬티를 입지 않았다, 거의 발가벗고 다녔다. 대충 룽기로 몸을 가리고 해변을 향해 걸었다. 볼 때마다 다리를 절어 불쌍한 척 하는 강아지가 멀쩡한 네 다리로 가드라도 해 준답시고 시답잖게 뒤를 따라왔다.

해변에는 기백명의 사람들이 흐린 하늘과 바다를 뚜러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뿌리는 인도의 4대 성지중 하나였고 그래서 늘상 순례자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 보다는 해산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팬더라면 가봐야할 순례지인 것이다.

졸린 눈을 부비고 비틀비틀 해변에 다다랐다. 원주민들이 통나무로 만든 배를 탄 채 1-2 미터의 파고를 뚫고 먼 바다를 향해 돛배를 띄우고 있었다. 파도에 부디쳐 배가 작살이 날 것 같은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그까짓 몇 마리 잡히지도 않는 고기를 잡기 위해 자기 생명을 담보로 강한 바람을 맞으며 나가는 동안 그들의 친지로 보이는 사람들이 입을 다문 채 배가 나가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해변에는 똥을 싸러 나온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엉덩이를 깐 채 마찬가지로 배를 쳐다보며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누군 죽고, 누군 목숨을 걸고, 누군 그걸 지켜보고, 누군 그 와중에 똥을 싸고,

자다 깬 외국인 여행자는 룽기를 펄럭이며 한 시간 동안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그 소름끼치는 장면을 똥 냄새를 맡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배가 무사히 다 나갔다.

해변에 면한 숙소에 돌아와 마이클 무어콕의 소설을 잡았다. 글자가 눈에 잡히지 않았다. 소설이 주는 임프레션보다 훨씬 강렬한, 장엄하고 희극적인 삶이었다. 웃겨서 가슴 아프고 눈물이 글썽이는.

순례자들이 긴 수염과 주홍색 장삼을 펄럭이는 뿌리에서 우연히 작은 사원을 방문했다. 전날은 먹거리에 미쳐 스토브를 사러 시장에 갔다가 죽은 시체를 나르는 모습을 보았다. 장작 틈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시체가 놓여 있었다. 2m가 채 안되는 거리에서 시체 태우는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불가촉천민들이 시체 잘 타라고 기름을 뿌렸다. 불 쏘시개로 불을 붙였지만 시체는 의외로 잘 타지 않았다.

시체 타는 모양을 구경하던 브라만이 천민을 하나 쫓아내고 불피우는 이에게 돌을 집어 던졌다. 천민은 비난조차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돌에 맞은 발이 몹시 아파 보인다. 한쪽에서는 태우는 비용을 흥정하며 핏대를 올리고 있다. 살 익는 냄새 때문에 주위에는 뭐 줏어 먹을 것 없나 하고 동네 개들이 떼로 몰려와 어슬렁거렸다.

한쪽 구석에는 아이들이 어제 다 태운 시체 틈에서 뼈조각이라도 건질만한 것 없나 찾고 있다. 불은 잘 타오르지 않았다. 보다못한 몇몇 사람들이 불길을 잡으려고 천민을 재촉하며 답답한 나머지 훈수를 두고 있었다. 하늘에는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날았다. 열기 때문에 살갖이 차츰 벌어지며 익은 살을 드러낸다. 고개를 돌리자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가 망망하게 보였다. 서쪽 하늘로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갔다.

죽어서 태우기에는 안성맞춤인, 낭만적인 장소였다.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이런 장례라면 할 만 했다. 브라만이 뜬금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고맙다고 말했다. 뭐가 고맙다는 걸까.

살이 적당히 익어갈 무렵 자리를 빠져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시체가 빗속에서도 잘 탔는지 걱정스러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를 거진 한 시간 쯤 걸었다. 웃통을 벗었다. 천둥번개가 치고 강한 바람에 모래가 날려 정강이를 때려왔다. 하늘은 검고 해변은 포말이 남긴 하얀 안개에 휩싸였다.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인도에 도착한 지 3주째, 비자야와르의 두르가 사원에서 라이센스 사두에게 모종의 제식을 당하기 전까지 생각이랍시고 한 것은 대충 네 가지 정도 였다.

그러니까 카트만두에 안 가고 꼴까타로 가게 된 동기가 깔리 때문이었다는 것과, 우주론에 나타나는 뚱딴지같은 강한 인간중심주의와 그렉 이건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양자론과 의지의 개연성이 실은 한 뿌리여서 징그럽게 웃었다는 것, 히말라야 성자들의 인류에 대한 책임 문제와 달라이 라마를 왜 싫어했는지, 마지막으로 데자부와 평행우주 사이의 관계였다.

마지막 것은 섹스 구루였던 라즈니쉬와 더불어 영성 팔아 장사 잘 하고 있는 마하리시가 세운 아쉬람에 들어가려는 정열적이고 학구적인 어떤 수행자가, 내가 보기엔 사기꾼 내지는 인도 길바닥에 널려있는 개사두(Sadhu)같은 디팍 초프라를 인용하다가 데자부가 도대체 어떤 현상인가, 하시시 잘 빨다가 갑자기 나한테 질문을 해서 그랬다.

그 동안은 생각을 안 하니까 참 즐거웠다. 그동안은 여호와가 에덴에 사과나무 심은 이유에 관해 즐겁고 천박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과 하나 따먹은 걸로 대대로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점도 그렇지만 사제들이 악마의 개념을 제멋대로 만들어 낸 탓도 있어서 기독교는 정이 안 가는 편이었다. 기독교가 악마를 만들어내자 마니교를 쓸어버린 조로아스터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사실 기독교도와 얘기를 하다보면 그들이 신앙이 지닌 갖가지 언어적 도그마와 자신의 신심(이건 때때로 진실했다)을 뒤섞어 놓아 정직하지 못한 위선자라는 인상을 받고는 했다.

마하리시의 가르침을 받아보려는 수행자는 두번째 인도에 오면서 그의 오롯한 지성이었던 여호와를 버렸다. 개사두마저 짖어대는 인도식 맛살라 생철학(흔히 개똥철학이라고 한다) 앞에서는 여호와 말씀이 변비똥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개사두들은 속세에 가끔 깨달음을 전해주며 7천년 동안 그 품질을 유지했고 깨달음을 팔아 밥벌이를 했다. 어쨌거나 나는 관광 사두에게 꿈꿈 가루를 100루피 주고 받은 후 사틴처럼 깨끗하던 처녀성을 팔았다.

코코넛은 깨지지 않았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크리슈나 강변 언덕에서 삶이 쓸려가는 먼지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피곤하면 별 생각이 다 들게 마련이다.

every man has his humor -- 개성존중!



아이들로부터 이상한 것을 배웠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가르쳐준 인짓기는 서양에서는 흔히 악마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인도인을 만나면 슬며시 검지, 중지를 구부리고 엄지와 약지를 곧게 펴는 사인을 지어보였다. 그러면 그들은 마치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가르쳐 준 녀석은 나를 바바라고 불렀다. 바바, 더 수퍼스타라고. 내가? 왜?

우연한 기회에 타밀 나두 주에서 동명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달짝지근한 거개 인도 영화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아이가 태어난다. 히말라야에 살고 있는 전설적인 바바지로부터 축복을 받았던지, 아니면 바바지의 화신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바바지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그냥 존재한다)

그는 시바의 화신인 크리슈나처럼 개망나니로 잘 살다가 어느날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민중의 영웅이 될 뻔 했다. 사랑 얘기는 일찌감치 접었다. 볼리우드 영화와 다른 점이었다.

화면 상에서 여자가 사라진 후반부는 정치적 종교적 폭력적이 되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바바는 수행을 더 하려고 그를 숭배하는 13명의 사두와 도시를 떠나 히말라야로 향할 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죽고, 그의 어머니는 피살되었다. 그는 여자를 버렸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세속에 더 이상 미련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히말라야로 향하는 여정의 첫발이 시작되기도 전에 등을 돌리고 다시 돌아온다.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바바의 인을 짓고.

그 마지막 장면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히말라야에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시발 새끼들에게는 도대체 정이 가지 않았다. 지들만 깨닫고 지들만 천당 맛을 보고 그냥 가 버리는(go up) 좆같은 새끼들은 악덕 정치가나 조직 폭력배 만도 못한 개자식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바바는 그런 놈이 아니었다. 바바는 예수나 부처같은 친구였다. 그는 고통을 민중과 함께 나누고 워낙 돌대가리들이라 사랑과 자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여유가 없는 한심한 놈들과 함께 살려고 했다. 그래서 눈물이 글썽였다. 깨달은 놈들아, 세상을 구해다오.

그럼 이렇게 묻겠지? 세상에 뭘 더 구할 것이 있다고. 너 없어도 잘 돌아가는데...

생각없이 살기도 쉽지 않다.

달라이 라마에게 후광이 보이지 않아 그 양반을 성자 취급 안한다니까 은조 아저씨는 그 천박하고 시답잖은 관점에 뜨악해서 방탄유리 탓에 후광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은조 아저씨랑 동양철학 얘길 하다가 엄청 씹혔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과학은 이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여러 사실들에 관해 뒷다마나 까고 있는 한심하고 덜 떨어진 오랑캐 문물 같은 것이었다. 실은 내가 양자론과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또다른 도그마에 관해 시끄럽게 혼자만 떠들어대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별다른 기적 없이 중생을 거느린 부처는 정말 신비스러운 인물이었다. 대가섭은 부처의 열반 소식에 슬퍼했다. 파드마 삼바바도 신비한 인물이었다. 죽어라고 윤회를 거듭하는 라마들 역시 희안한 인물들이긴 했다. 신비한 파드마 삼바바의 주장에 따르면 윤회의 고리를 끊어야 제대로 깨달아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하는데(옴마니밧메훔) 그의 주장은 티벳밀교의 견해고 티벳불교의 계승자인 라마 시리즈는 아직 덜 깨달은 탓인지 후광도 변변찮고 죽어라고 윤회를 거듭하고 있었다(옴마니밧메훔).

파드마 삼바바의 또다른 주장에 따르면 자꾸 그렇게 깨닫지 못하면 나중에 짐승이 된다고 했다. 아직 짐승은 되지 않았지만(주로 개가 된다던데) 달라이 라마가 육식을 중단했다는 얘기를 예전에 들었고 그래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심지어 기적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성자 주제에. 후광도 없고, 기적도 못 일으키고, 티벳을 그 꼴로 만들어 놓고. 잘 하는 짓이다. 그의 시시껄렁한 유머감각은 좀 아니다 싶지만 그래도 그의 '개성'을 존중하려고 애쓰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을 읽다가 왜 내가 달라이 라마를 싫어하는지 새삼스럽게 느꼈다.

은조 아저씨가 수행을 했으며 희말라야 사두들과 하시시를 빨며 맞짱을 떴다는 얘기는 믿어지지 않는다.

무림의 대혈겁이 지나가고 이제는 꺽인 깃발과 이름없는 무수한 무덤 만이 남아있는 무림 12대파 중 한 곳의 근거지였던 창산의 어느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발가벗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동행한 조선족 아저씨는 내 승마 솜씨에 약간 기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발가벗은 채 차갑고 맑은 물 속에서 아이처럼 첨벙이는 동안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것 같았다.

그의 몸끝이 내 것보다 크고 굵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만에 사타구니 사이를 햇볕에 태워 기분이 상쾌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인류의 몇 퍼센트가 성인이 된 후 사타구니 사이를 태워 보았겠는가. 괴성을 지르며 밀림을 누비던 타잔 조차도 그러지 못했다.

4가지는 분별력으로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물, 불, 바람, 흙. 그래서 물 불 안 가리는 바보를 싸가지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말한다. 4가지가 부족하다고 쉽사리 얘기할 수 없지만 오만가지 개성은 오만가지 희극의 온상이다. 그런데 4가지는 있지만서도 2% 부족한 인간은 의외로 많았다. 담대하게 개무시하자니 각자가 지닌 중력에 의한 섭동이 신경을 건드린다. 4가지 없음은 다른 많은 증세(symptom)과 달리 좋은 음식과 기후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생각을 멈추었을 때 과거는 사라진다. 지식과 경험으로 축적된 과거는 때때로 나 자신인 것처럼 여겨져 논쟁을 통해 얄팍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착각을 멈추면 깊이와 두께를 잃고 광자를 세고 있는 얼간이가 남았다.

수년 동안의 수련으로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는 절전형 명상 상태였다. 위대한 수도자들이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자기 자신을, 또는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머물러야 하는 극단적으로 멍청하고 예민한 자각 상태다. 하시시는 다른 모든 '현재'와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보조수단일 따름이다. 그래도 사고 작용은 지속된다. 명상이 위험한 것은 때가 되면 부교감 신경계를 직접 제어해서 자신의 심장을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죽음 내지는 열반이다. 사고 작용이 지속되는 덕택에, 부교감 신경계는 저 나름으로 살기 위해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으므로 돈 다발을 셀 수 있었다.

2주가 지난 후 더 이상 약물을 빨지 않았다. 두뇌 개발에 필수적이었던 알콜이나, 커피 한 잔 마시고 느꼈던 강렬한 카페인 충격이나, 길고 긴 죽통으로 피우던 담배 연기 역시.

기억에는 반감기가 존재한다. 기억은 신뢰할 수 없는 비이성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지성은 보고 느끼는 현재에 대한 직관이다. 선각자들의 말씀인데 요새는 육을 입지 않은 이 말이 사방에 나돌았다. 하여튼 남은 지폐를 세어 보았다. 이런 식이라면 2년도 버티겠군. 허비할 인생은 남아 있지도 않았다. 할만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듯이, 사라진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

better leave it unsaid - 지성 현실 철학 인생 사랑



떠날 때를 안다.

떠날 때가 있다.

떠난 적도, 머문 적도 없다.

목적지가 없다.

떠나면 안 된다.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중국인에게 뭔가를 간절히 묻고 있는, 중국어를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는 한 한국인이 만나 필담을 나누지 않은 채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은 대충 이렇다: 동상이몽 -> 동문서답 -> 마이동풍 -> 주마간산 -> 오리무중 -> 막무가내 -> 점입가경 -> 자포자기 (-> 오비이락).

베트남 여행이 통 재미가 없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 무진장 재미있게 다녔다는 듯이 써 놓은 글들이 많았다. 참 긍정적인 생각을 잘 한다고 생각했다(또 다른 이유도 있지만 사람들 비아냥거리는 것이 참 안 좋은 짓인 것 같기도 하다). 난 그저 긍정적인 생각도, 부정적인 생각도 잘 안 하려는 편이다. 어떤 나라에 가면 어서 빨리 그 나라에 적응해 섞여 들어가길 바라는 정도랄까. 그래서 수염을 밀고 머리를 깎기도 했다. 여행 중에는 할 일이 여행 밖에 없으므로 그 나라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사람, 경제, 사회 정도. 그것 말고도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했다. 그래서 여행자보다는 현지인과의 대화를 선호했다.

베트남의 명승유적지는 대체로 쓰레기 같았고 여행지로 볼 때 무척 황량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황무지에 하이에나와 콘돌이 어슬렁거린다. 길게 얘기해 볼까 하다가 귀찮기도 하고 내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와서 보겠지 싶었다. 여행자라는 사람들은 가고 싶을 때 가지 말라고 말린다고 안 갈 사람들이 아니니까.

여행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되서 툭하면 바람난 미친년처럼 싸돌아다니는 여자들에 대해서도 뭐라고 안 한다. 그건 술 마시고 계집질하다가 인생 망치는 녀석에게도 나름대로 그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삐끼한테 속아 몸 망치고 돈 갖다 바치면서도 다시 거길 가겠다고 우기더라도.

로맨틱하다는 것은 약간 슬픈 것이긴 하다. 마치 트루게네프의 연애소설처럼. 에... 또는 트루게네프 같은 어떤 제비의 경구처럼.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결코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즐겁고 재밌고 그렇게 평범한 여행은 어느 것이나 비슷해 보이지만 빡쎈 여행은 저마다 나름대로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톨스토이 만세가 말씀하셨다.

...

중국에서는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맥주를 한 잔 들이키고 '될대로 되라' 스피릿을 고양시켰다. 일이 정말 잘 안 풀릴 때는 맥주를 좀 더 마셨다. 베트남 와서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사람들이 '상냥해서' 그 양을 4배로 늘렸다. 350CC 짜리 아주 맛있는 생맥주 한 잔에 한화로 120원 정도니까, 시원하게 그것을 들이키면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었고 모든 일은 원래 되어야 하는 바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나갔다. 다시말해, 될 대로 되었다.

터덜터덜 걸어서 국경을 넘어갔다. 이전에 너무 잘 쉬어 배낭이 무거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걸으면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인 만나려고 찾아간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에서 조차 홍콩인과 같은 방을 썼다. 뭐, 재밌긴 했지만, 그나마 그는 하루 묵고 떠났다. 그리고 내내 아무도 안 왔다. 아무도.

여행 내내 도미토리를 마치 싱글룸처럼 사용했다. 대여섯 명이 누울 수 있는 침대만 썰렁하게 남아 있었다. 중요한 정보를 얻으려 해도 그 루트를 간 사람이 없었다. 개척은 생각보다 피를 말렸다. 기차마다 3등이었고 타는 버스마다 3등이었다. 티켓을 그렇게 끊어주니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서양애들처럼 트래블 에이전시를 통할까? 누군가의 말대로 그게 '어나더 이코노미컬 임페리얼리즘'으로 보이기도 했다; 값싼 나라에서 비싸게 여행하는 법. 참고로 내 여행의 모토는 이랬다.

값싸게 살자.

날 졸졸 따라다니던 프랑스 친구가 길에서 방금 먹은 음식을 토해냈다. 내 흉내 내며 꾀죄죄한 소수민족 틈에 끼어 값 싸고 비위생적인 식사를 했으니까. 그러게 니들은 분위기 있는 여행자 식당에서 바게트나 커틀렛 따위를 먹으며 안전하고 시시한 투어 버스를 탈 것이지. 임페리얼리즘 계속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영어'가 안 통하는 공산권 사람들을 붙들고 버스 터미널을 못 찾아 손짓 발짓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버스 터미널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없었다. `버스`라는 고유명사같은 것도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적당히 협상하고 오토바이 뒤에 앉아 산을 넘었다. 죽여주는 비포장 도로였다. 산기슭에 걸린 운무 속에서 비인지 우박인지를 아프게 맞고 홀딱 젖고 진흙 투성이가 되어 한 시간 반 넘게 달려 소수민족이 우글거리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하여튼 그 과정은 재미있었다.

소수민족이라면 입에서 신물이 넘어올 정도로 많이 봤다. 이들이 없어지기 전에 보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 모이 주듯 소수민족이 파는 기념품 하나 사면서 그걸 미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소수민족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들은 천연기념물이 아니다. 왜 이곳에 와 보라고 했을까. 뭐, 나야 일정도 없고 가이드북도 없지만. 노래 한 곡:

이것 저것 아무 것도 없는 잡초라네~

옆에 앉아 있던 몽족 할아버지가 술을 권했다. 머루주같은 술이었다. 마시고 나자 강력한 '될대로 되라' 스피릿이 용솟음쳤다. 그래서 한 병을 다 비우고 삐끼들을 이끌고 함께 가격을 고민하며 거리를 헤메다가 전망좋은 방을 잡았다. 주인 아줌마가 한국인은 모두 잘 생겼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다르긴 하지만 잘 생긴 한국인은 그래서 7$에 한 층 전체의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그 숙소가 그 나라를 떠날 때까지 묵었던 숙소 중 가장 비싼 것이었다 -- 잘 생긴 한국인은 화끈하게 돈도 잘 썼다. 침대에 레이스 달린 모기장이 있었다. 3면이 유리창이라 운무가 피어오르는 멋진 산을 3차원적으로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fireplace마저 있었다. 풍광이 아름다운 베란다에 멍하니 앉아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곰곰히 생각했다. 멀리 산길을 따라 소수민족이 꾸역꾸역 지나갔다. 그들은 '관광 흐몽족'이었다.



베트남에서 묵었던 최고의 숙소.

여행 가이드를 하던 친구는 내가 태국 북부에 가겠다니까 적극적으로 말렸다. 인류학과 출신인데 내가 소수민족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행 내내 인류학 얘기만 하게 된 셈인가? 우린 카렌족과 위구르 족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와 최신 골상학에 관한 정보를 주고 받았다. 그와 나는 서바이벌 여행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아... 소수민족은 정말 지겹다. 이제 왠간한 인류학도는 나하고 지식 면에서 쨉이 안된다. 예:

콜로라도에 사는 울분을 참지 못하는 소수민족, 인디언은 수십년전 콜로라도 강 유역을 돌려 달라는 소송을 연방정부에 청구했다. 대대로 물려받아 그들이 거주하던 땅을 백인들이 잔혹하게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제 좋은 세상이 왔으니까 계산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

그 와중에 한 과학자가 그 지역에서 뼈다귀를 몇 개 발견했다. 연대 측정을 해 보니 인디언이 살기 훨씬 이전에 들판에서 엉덩이에 창 맞고 아프게 죽은 '코카서스'였다. 아메리카에 백인 선주민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신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pc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쪼다들도 많이 생겼다. (political correctness는 사내가 가져야 할 태도가 못 된다고 믿는 편이다) 뼈다귀는 군이 압수하고 더 이상의 과학적 조사가 금지되었다. 또다른 뼈가 발견될 우려가 있을지도 몰라 그곳에 돌과 부식토를 쏟아 부어 십수만 년 전의 증거(?)를 없애려 한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군바리들은 실재로 그렇게 했다.

인디언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영험스러운 땅의 현재 값어치는 천문학적이었다. 과학자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그들 모두(인디언, 군 관계자, 정치가, 기타 이것저것 꼬치꼬치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절규했다. 과학자는 사회 생활을 적게 한 탓인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소수민족도 남들처럼 먹고 살아야 하며, 복지생활을 누려야 하고, 문화생활도 해야 하고, 심지어는 투표권도 가지고 있다는 점. 중차대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소수민족 마을에 티비가 있고 전화가 있고 그들 모두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수공예품이라고 사기를 치며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팔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관광지 기념품의 유일한 내재 가치는 요새 이렇게 변해갔다:

왔다 갔다.

개중 아메리칸 인디언이 제일 고단수인데 그들은 '내비둬 정신'과 안먹어도 배부른 '영적 가치'를 장사수단으로 삼았다. 참고로, 내가 본 소수민족은 모두 가라오케에 지나치게 열중했다. 덕택에 몇몇 티베탄 가수는 요새 아주 잘 나가고 있다. 노래는 그저 그런 시시한 락 발라드임에도 불구하고 민속의상 입고 민속악기로 장단만 맞추면 희안하게도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조만간 바이족의 비애를 담은, 랩송이 히트칠 전망이다. 아 인도식 찬트도 있다. 3000여명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하레라마를 부르게 한 후 테잎으로 떴는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샴발라 썬과 엔라이트먼트의 정기구독자들, 메디테이션과 뉴에이지와 몸을 꼬는 요가가 장수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하나씩은 테잎을 가지고 있다. 나도 어쩌다 수백곡을 가지고 있지만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느긋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해야 장수 한다고 믿는 편이었다. 뭐 그런 시답잖은 서구 장르 음악 흉내낸 것들 말고 구닥다리 민속음악이 좋기만 하더라.

하여튼 정말 그들을 그들 모습대로 살게 하고 싶으면 인디언이 밥 먹듯이 하는 말, 그냥 좀 내비둬라. 조상이 묻힌 신성한 땅을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그만 파헤치고 이상한 환상 갖지 말고 함께 문명을 만끽하도록 해줘라.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엉덩이에 창을 꼿고 돌아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은 소수민족 코카서스의 진실은 하여튼 그러했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을 하도 많이 봐서 나중에는 그들의 복식이 헷갈렸다. 어렸을 적에 복식의 역사 인가 하는 책을 보고 머리가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난다. 복식에 오랜 역사적 당위성 내지는 합리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순진한 소년이었다. 지금은 그냥 복식이 저렇게 희안한 것은 날씨 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공식적으로 중국정부가 인정한 소수민족은 25족, 실제로는 50여족 이상이 살고 있었다. 헷갈리니까 전부 통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중화사상이란 것이 그런 것인 것 같다. 한족은 전체 인구의 30% 밖에 안되니까 걔들도 소수민족이 된다. 한족으로부터 훌륭한 레이시즘을 배웠는데(자기들 말로는 '중국에는 인종차별주의가 없다. 왜냐하면 흑인이 없으니까.' 라고 하던데 한 한족 어른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소수민족은 머리가 나쁜 관계로 쓰레기 수거 정도나 시키면 좋다') 소수민족은 국가 운영에 방해가 되므로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러니까 한족의 씨를 말려야 한다.

길 가다가 잡아 세우고 상호 이해(동상이몽)에 바탕을 둔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여관? 교통? 여기까지는 남들하고 똑 같다. 여자? 환전? 최근에 레파토리가 몇 개 더 추가 되었는데 아편? 마리화나? 였다. 여행자들과 얘기를 해보니 대체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느냐고 날더러 가르쳐 달랜다. 흠. 도대체 시도 때도 없이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와 이것 저것 제안하는 그놈들은 날 뭘로 보고 있는 것일까.

한 동안은 어떤 남자나 여자가 다가와 짝짝 손뼉을 쳤다.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서 있으니까 '붐붐'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순식간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그런 각성의 순간을 `아하 모멘트`라고 부른다. 거리를 걷다보면 나를 향해 짝짝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이래서 으슥한 밤거리가 좋다. 최소한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거,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다가 박수 부대를 만나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연단에서 누군가가 연설을 하고 그에 호응하기 위해 박수를 친 것이다. 문화적 차이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여튼 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종족의 삐끼들에게 가장 즐겨, 자주 사용했던 단어는 이것이었다.

노 땡쓰.

보통 30세가 넘은 남자는 삐끼나 창녀의 친절한 도움 없이도 뭐든지 알아서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이를테면 절박한 상황에서의 암환전 같은 것.

암환전 하는 동안은 조마조마했다. 떡대 넷에 둘러싸여 으슥한 뒷골목을 한참 돌아 들어가 사방을 살피는 배달조가 들고온 달러를 세는 동안 잔대가리가 삼삼하게 굴러갔다. 은행 사무원들은 권위적인 말투로 환전 영수증이 없으면 환전해줄 수 없다고 해서 이렇게 으슥한 곳에서 뇌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 긴장을 풀었다. 한 놈이 돈 중 일부를 떼어 떡대 중 한 놈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짐작에 그 놈은 사복 공안이다. 그래서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어디가나 경찰은 개새끼다.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어제 한국 대 포르투갈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한국이 이겼단다. 한국이 이겨줘야 어디 가서 한국인이라고 떠들고 특혜를 받을 수 있지. 이를테면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을 때 미국비자 보고도 못 본 척 슬쩍 지나쳐 준다던가. 일본애들은 이겨도 미워 죽겠다는데야 어쩔 수 없지. 여긴 아시아잖아? 한국이 이긴 덕택인지 옆의 일본인들은 두 시간 내내 짐 검사를 하는데 나는 안 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전해준 이 친구는 장족 같은데. 장족이 술을 마시던가? 위족은 맥주를 마시고 백족은 아무거나 되는 대로 먹었다. 그들 모두 찢어지게 가난했다. 후족 젊은이들 대부분은 그들 지역이 관광특구로 개발되어 벌이가 짭잘해지자 양아치가 되어 있었다. 모습을 보면 영 골때렸다. 뒤통수를 한 대 치니 순박해졌다. 암. 소수민족은 순박해야 제맛이지.

토한다는 것. 설사, 배탈, 그리고 motion sickness(한국어로 뭐더라?) 베트남에서 역시 재수가 없어 10시간 기다리고 끊은 티켓은 그 멋진 컴파트먼트 베드가 있는 슬리퍼 티켓이 아니라 정말 잠 안 오게 생긴 딱딱한 공원 벤치 같은 나무 의자, 하드 시트였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줌마는 세 번쯤 게웠고 그때마다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잠을 못 잤다. 새벽 2시쯤 먹은 거 다 토하고 나서야 아줌마는 잠들었다. 히죽 웃고 자다가 누가 흔들어서 깨어보니 아줌마는 안간힘을 다해 구토를 참다가 바닥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30시간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토사물 냄새가 중국인 발 꼬랑내에 비하면 훨씬 상큼했다. 이후, 베트남 버스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토했거나 토하는 중인 장면을 목격했으며, 토하는 것이 버스 안에서 천천히 전염되어 웩웩 거리는 일종의 오케스트라를 형성하는 과정을 잠 못 자서 핏발 선 눈으로 목격했다. 구토가 멎으면 얌전히 내 어깨에 기대어 시들은 버드나무처럼 잠들었다. 닭과 거위들도 그제서야 잠이 들었다.

시속 45킬로미터로 달리는 초고속 버스는 밤이나 낮이나 건너편에 차가 있건 말건 앞에 가는 똥차를 추월했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건너 차선의 버스와 인사를 주고 받았다. 빠-앙(내가 간다) 빠빠빠빵(너냐? 나다) 빠앙 빵빵(굿 모닝) 빵 빵(빙신. 지금은 저녁이다) 중국 최고의 슈퍼 럭셔리 버스인 대우 딜럭스를 타보는 것이 소원 이었다. 그 버스에서는 닭똥 냄새도 안 날 것 같고 에어컨이 있어서 창문을 열고 다니느라 20시간만 타면 얼굴이 매연으로 시꺼매지지도 않을 것 같고 길 가는 아무 거위떼나 태우지도 않고 가끔 자다가 일어나서 차에서 내려 차를 밀어야 한다거나 퓨즈가 나가 차가 시동이 안 걸려서 비슷한 차가 지나가면 세워서 퓨즈를 빌리거나 어쩐 일인지 다 증발한 냉각수를 채우려고 계곡에서 물을 떠 올 때까지 무더위에 기다리거나 지붕에 얹어놓은 짐을 내릴 때마다 기어 올라가 짐을 고정시키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오버 크라우드는 그냥 기본이었다. 45명 짜리 버스에 120명이 타고 다녔다. 난 그저 잠만 잘 수 있다면 무릅이 앞 의자에 닿고 커튼이 없는 창틀에 기댄 대가리가 엉망진창인 도로 때문에 심하게 덜덜 떨다가 멍이 들어도 별 상관 없었다. 아름다운 눈을 표현할 때 거위같은 눈이라고 했던가? 빌어먹을 버스 덕택에 옆에 무례하게 앉아있는 거위 눈이 참 예쁘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시끄러워서 몇 마리는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긴 했다. 그건 다 참을 수 있다. 다른 여행자들 중 그런 버스를 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모든 버스가 그런 줄 알았으며 수퍼 럭셔리 대우 디럭스 버스는 갑부들만 타는 줄 알았다. 늘 재수가 없다는 점, 그 점이 견디기 힘들었다. 버스는 그 정도고 기차는 매번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빠져 나올 때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18시간 동안 하드 시트에 앉아 옆에서 비비적거리는 고통스러운 인파를 헤치고 나올 때는 맑은 공기, 푸른 하늘, 살아있다는 환희, 자유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역시 다른 여행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들은 최소한 하루 전에 표를 구입했던 것이다.

어딘가 구국의 칼이 묻혀 있다는 엑스칼리버적인 전설이 서려 있는 시내 중심가 호수에서(공짜니까) 다른 거지들처럼 자고 있는데, 누가 내 샌달을 훔쳐갔다. 한국에서 3년 전에 5000원 주고 산 것인데 거의 누더기가 된 그것을 왜 훔쳐갔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한데 자신의 신발을 1$에 팔아 어떻게든 주린 배를 채우려고 애원하다시피하는 거지를 설득해(할 일도 없지 않냐?) 그의 신발을 빌려 신고 그에게 맨발로 시장까지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개중 가장 싸고 후져 보이는 쪼리를 1$에 사자, 거지가 왜 자기껀 단가가 7$이나 하는건데 싸게 파는 걸 안 사 주냐고 떼를 썼다. 니껀 헌 것이고 이건 새 것이잖아 임마.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 거지의 헌 신발이 새로 산 것 보다는 나아 보여서 후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체면에 거지 신발을 중고로 사서 신고 다닐 수도 없고... 벤치에 앉아 그 거지한테 동료 거지의 못된 짓에 관한 심정적인 연대 책임을 물어 담배를 뺏어 피우면서 신발을 업어간 새끼를 저주했다. 그는 뭐 그럴 수도 있는거지 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우리는 0.0703125$짜리 바게뜨를 사서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주변 거지떼와 함께 멍하니 호수를 쳐다봤다. 그 구국의 칼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거북이가 입에 물고 나타난다고 했다. 어쩌면 그 거북이 새끼가 나중에 구국의 샌달로 요긴하게 써먹으려고 업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발 냄새 날텐데... 거북이란 동물은 생긴 모양도 웃기지만 참 엉뚱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못된 거북이 생각으로 부루퉁해 있는 나를 향해 새 쪼리를 신은 내 모습이 참 어엿해 보인다고 위로해 주었다. 말하자면 힘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내 빵을 한 조각 뜯어 주었다.

소문으로만 듣고 있는 무이네 해변에는 모래둔덕이 있다. 한쪽은 사막이고 한쪽은 바다가 있고 그 가운데를 야자수가 갈라놓고 있다. 바람은 모래둔덕의 형상을 천천히,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없이 바꾸어 놓는다. 마음에 드는 완벽한 모래언덕을 찍으려고 사진작가는 뙤약볕에 땀을 흘리며 수많은 시간을 참을성있게 보낸다. 사진에 담을만한 그 완벽한 순간을 사진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Kodak Moment

겁나게 사진이 잘 찍힐 것 같아 보이는, 그 무게만큼의 금덩이 같은 코닥 카메라를 만져봤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왠지 고작 1200장 밖에 못 찍는 내 디지탈 카메라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사진을 배우고 싶다. 망원 렌즈가 있었더라면 사람들의 표정을 아무런 간섭 없이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담을 수 있을텐데 하고 중얼거리자 카메라 주인이 즉시, 단호하게 충고했다. 일단 찍고 보고, 나중에 뺨 맞을 각오하지 않으면 사진 찍을 생각하지 말라고. 그렇군. 뺨 맞을 각오를 해야 되는군.

내 사진에는 사람이 없다. 자기를 찍으려는 카메라를 향해 웃는 사람에게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뺨 맞기도 그렇고. 짐승들은 그 점에서는 참 좋았다. 하지만 20원이나 내고 방문한 동물원의 자이언트 판다는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손님을 맞이할 생각은 안 하고 덥다고 엎어져 자고 있었다.

백족 뱃사공과 만났던 어느 늦은 오후가 생각났다. 햇살과 바람이 등을 떠밀던, 할 일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배를 잡아 탔다. 그는 아이가 둘이고 호수에는 청어, 백어, 황어가 산다고 주장했다. 그가 즐겨 마시는 술은 백주 였고 동네에서는 황주, 홍주, 백주를 판다고 주장했다. 마오타이주는? 유감스럽게도 마오타이 주는 백족의 역사와 무관했다.

그는 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오리떼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중얼거렸다. 저게 다 내꺼요. 토탈 250마리지. 하루에 200개의 알을 낳는다오. 정말 다 당신꺼냐고 멍청하게 물었다. 내가 부르면 제까닥 집으로 돌아가지. 하하. 그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오리는 물속에 고개를 쳐박고 생각에 잠겨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파람을 몇 차례 더 불었지만 생각을 마친 오리는 관심 없다는 듯이 다른 방향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백족 아저씨는 정열적으로 오리를 향해 뭔가를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백족의 언어였지만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이쯤 된다:

개새끼.

엎어져 자고 있던 판다한테 내가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수는 넓었고 그는 노를 놓은 채 오리가 250마리나 있으면서도 나한테 바가지를 씌웠다. 자기는 수영할 줄 알고 나는 수영 못했다. 못 주겠다고 우기니까 백족 언어로 (그들은 문자가 없다) 욕설을 중얼거렸다. 나는 문자도 있는 한국어로 분위기 있게 몇 마디 진실한 욕설을 했다.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까짓 협박이야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 슬슬 어스름이 깔리면 아무도 못 볼테니까 목 졸라 죽이고 발장구 쳐서 가면 되니까.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흘러가는 노를 주워왔고 우리는 다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맨손 오리 사냥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썰렁한 중국 시 나부랑이 따윈 생각나지 않았다.

문득 판다가 그리워졌다. 판다의 엄지라는 책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 읽은 그의 책에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확률적 죽음의 그물을 빠져나온 자신의 투병 생활 얘기를 했다. 그는 강력한 이성을 지닌 암 환자였다. 그는 자신만만했으며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암으로 죽었다. 기분이 씁쓸했다.

백족 아저씨랑 호수 한가운데에서 술이나 마시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이 호수는 제대로 흐르지 않았고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호수는 귀 모양으로 생겨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개뻥을 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중국인들이 그 호수를 바다라고 칭했다. 내 고향에도 바다라 불리는 강이 있었다.

소수민족은 먹고 살아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의 25개 소수민족 중 그나마 중국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고 있었다. 자기들 언어를 갖고 있고 깨끗하고 근면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중국의 화폐중 가장 액면가가 낮은 화폐에 한복 입고 조선족이 등장한다.

한족은 공식적으로 애를 하나만 낳을 수 있다. 소수민족은 둘까지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밤에 할 일이 없는 시골(소수민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전체 인구의 70% 정도라면)에서는 아이를 오리알처럼 꾸준히 생산한다. 그들은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사회보장 번호가 없으며 국적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도시로 팔려간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정도로도 기꺼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중국돈으로 30원을 주면 그렇게 국적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어린 여자애 중 아무하고나 잘 수 있다. 그래도 고마워 한다. 돈 줘서 고맙다고. 걔네들 중 그나마 한달에 월급 잘 받아봤자 500원에서 1000원이다. 30원이면 나는 국수 여섯 그릇을 먹거나, 요리 네 가지 정도를 한끼 식사로 먹을 수 있다. 500원 받으면 그걸로 뭘하나... 4개월 푼푼이 모아서 핸드폰 산다. 분당 0.7원 하는 전화를 걸어 애인을 만들고 찢어지게 가난할 소수민족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한 마디로 소수민족은 똥값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돈을 함부로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맨날 거지같이 다니지.

조선족을 무수히 만나면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한국인과 같은 문자, 같은 정서,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인이다. 문화중 일부가 아니 어떤 부분이 어떤 정서가 미묘하게 다르다. 결론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중국이 훗날 어떤 치명적인 계기로 말미암아 소수민족 문제와 빈부격차, 이것들을 주도한 산아제한이라는 유명무실한 당 정책, 그리고 내부 권력투쟁으로 갈갈이 찢어져도 만주국이 생길 지언정 한국이 넓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느낀 그 불안한 '차이'를 다른 사람도 느끼고 있을까?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

중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 푸짐한 마지막 만찬을 갖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지막 샤워를 하러 샤워룸에 들어갔다. 옷걸이에는 누군가 잊고 간 특대 사이즈의 브라가 걸려 있었다. 장관이었다.

중국의 어떤 게스트하우스는 샤워룸이 유니섹스라 여자들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샤워를 한참하고 있는데 옆 칸에서 여자들 말소리가 들려왔고 곧 이어 옷을 벗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나오면서 그들의 몸에 난 털을 정성을 기울여 세심하게 그러나 무뚝뚝하게 슬쩍 쳐다보면서 나왔다. 아래 위로 훑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 몸과 달리 여자의 몸에는 퀄리티를 결정하는 중요한 상수(변수?) 3개가 있으니까.

나오는 입구에서 건너편 문패가 보였다. Men 이라고 씌여 있었다. 뒤돌아서서 방금 나온 곳의 문패를 보았다. Women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후로 한 주 동안은 꿈꿀 때마다 그들의 벗은 모습이 생각났다. 코닥 모멘트였다.

코코넛 모멘트라는 것도 있다. 어떤 해변에서 아무런 연장 없이 코코넛 먹는 방법을 드디어 발견했다. 해변에서 떼굴떼굴 굴러 다니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까운 야자수에 쌓여있는 코코넛을 보았지만 도끼가 없어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떼의 아이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마치 원숭이 같았다. 그들은 코코넛을 힘차게 바위에 던졌다. 간단히 말해, 존나게 바위에 두들기자, 코코넛이 갈라지면서 안의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반쯤 깨진 야자를 번쩍 들어 액체를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흡입했다. 그들의 흉부를 흠뻑 적시며 흘러내리는 야자의 달콤미적지근한 수액... 그리고 다시 존나게 코코넛을 두들겨 반 토막을 내어 안의 흰 부위를 손으로 마구 긁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머리 속에서 전구가 번쩍 켜지는 순간이었다. 고구마를 씻어 먹는 백번째 원숭이가 된 기분으로 벌떡 일어나 코코넛을 깼다. 일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잊을 수 없는 코코넛 모멘트였다.

보름달을 보았다. 호수와 야트막한 대지와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속으로 거대한 보름달이 갑자기 떠올랐다. 카메라로 허겁지겁 그 광경을 담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카메라의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고 조작 기술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놓았다. 2002년 유월 이십사일 오후 일곱시 이십이분,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선선한 달랏, 일명 '사랑의 계곡'에 위치한 어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젊고 행복해 보이는 한국인 부부 여행자와 식사를 함께 하며 아름다운 달을 뿌듯하게 감상하다.

서술적 기억은 시공간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잡아내는데는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 말의 끊임없는 연쇄와 비유를 재생산하는 형편없이 비효율적인 공정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닥쳐!

베트남인들의 오버차징에 사정없이 당해 마음의 상처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오버차징에는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은 못 살고 너희들(외국인)은 잘 살기 때문이다 라는. 베트남은 매우 윤택한 자연 환경을 타고 났다. 그들의 생활은 궁핍하지 않았고 삶의 질도 높은 편이었다. 단지, 그들은 머리가 좀 이상했다.

베트남에 오기 전부터 베트남 사람들이 부지런하다는 말을 들었다. 새벽 5시에 이미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과 밤 늦게까지 일하는 근면성, 그리고 몽골과 프랑스와 미제국주의를 물리친 그들의 강한 긍지와 자부심 등등. 그런데 그들이 정말 부지런한가 자세히 봤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이유는 더위를 피하려고 선선한 새벽 일찌감치 일어나는 것일 따름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동쪽의 바다를 면한 평지라 아침이 매우 빨리 찾아오는 탓도 있었다. 낮시간의 대부분은 다른 열대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별일 없이 흘려보낸다. 밤이 되면 시장과 거리가 다시 북적거린다. 사람들은 노천 까페에 앉아 맥주나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남자들 대개는 할일없이 낮 시간 대부분을 그늘에서 놀고 있었다. 공사판에서는 여자가 삽질을 주로 했다.

동양의 대부분 국가들이 그렇듯이 베트남 여자들도 흰 피부를 숭상했다. 회족이 아니다 뿐이지 차림은 회족 처럼 온몸의 노출된 부위를 햇볕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했다. 피부가 참 알맞게 잘 익으셨군요 라는 말을 베트남 여성에게 한다면 그건 틀림없는 욕설이다.

대부분의 가게, 음식점, 심지어는 여행 사무소 마저 여자들이 일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은 교육수준이 매우 높으나 대학을 나와 별로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받아 쓰는 사무실의 사서 노릇 정도를 하고 있었다. 사자의 사회라고 중얼거렸다. 아일랜드 친구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사자들 수컷은 놀고 암컷이 다 하잖아. 그 친구의 얼굴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 베트남 여성은 그런 식으로도 사랑 받았다.

베트남에서 사람들의 표정에 미소가 충만하다는 것은 그들이 별 걱정없이 행복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간다는 증거다.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태국은 확실히 베트남보다는 덜 일하지만 아주 다른 이유로 베트남처럼 외국인 탓을 하지 않았다. 태국과 베트남은 비슷한 점이 참 많은데도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여튼 베트남이 못사는 마땅한 이유가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아 며칠을 생각해봤다.

이유는 정치에 있었다. 대내정책, 대외정책에서 베트남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도이 모이(경제 개혁 정책) 이후 베트남은 자본주의의 가장 더럽고 치사한 탐욕 만을 수입했다. 다른 모든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베트남은 사회 경제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도로체계 조차 엉망진창인 나라다. 관료주의는 중국을 따라잡고 겉멋은 프랑스식이고 멍청함은 미국을 닮았다. 그래서 그들이 중국(몽골)과 프랑스와 미국을 이겼다는 자부심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권위있어 보이는 중국식 언어와 명명과 프랑스식으로 엉망인 거리 이름을 사용하고 미국 달러를 그들의 화폐와 동등하게 사용했다. 음식도, 문화도 그런 식으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들의 화폐인 dong을 d에 강한 액센트를 주고 발음해 볼 것: 그들 화폐의 값어치다. 베트남은 그래서 아무리 좋게 봐도 개판이었다.

중국인과 친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친연,가족관계와 월 수입, 집의 크기,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 배기량에 관해 납득할만큼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 후 이름을 교환했다. 그는 종이에 쓴 내 이름을 이렇게 큰 소리로 읽었다.

딩! 씨앙! 돈!

베트남인과 친해졌다. 우리는 노천까페에서 만나 서로의 가족 관계를 묻고 미혼 상태는 죄악이며 자식은 역시 둘이 좋다는 점에 합의하고 맥주잔을 부딛친 후, 서로의 이름을 교환했다. 그는 말로 알려준 내 이름을 이렇게 발음했다. 친근하게.

미스터 팅동~

그들의 이름은 각각 4성조, 6성조로 지빠귀 지저귀듯이 발음해야 하는데, 복잡해서 그냥 잊어 버렸다. 그들이 내 이름 만큼은 잊어줬으면 좋겠다. 장미의 이름이 그 모양이듯이.

베트남에서 `효도관광`중 처음 만난 한 한국인 아가씨는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맛있어요?

첫 인사 치고는 참 기괴했지만 입을 우물거리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그럭저럭 먹을만 하군요.

그와 식당에서 밥 먹다 말고 한국전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겼고,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축구 얘기는 5분 안에 끝났다. 피차 아는게 없으니까. 그의 전직은 약사였다. 나는 진화의학과 이브의 이동 원인에 관한 세 가지 흥미로운 주장들, 그리고 코카 콜라 유전자에 관한 얘기를 했다.보통 술집에서 친구들에게 그런 류의 얘기를 하면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들 쓰러졌다. 지겨워 하니까.

그에게 배우자 선택에 관한 재밌는 실험 결과에 관한 얘기도 했다. 그에게 내 주장, 그러니까 세상에 약은 세 종류 밖에 없는데 진통제와 항생제와 영양제가 그것이다 라고 하니까 맞다고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그래서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때까지, 가게 주인 아줌마가 지쳐 잠들 때까지 즐겁게 얘기할 수 있었다.

문득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이 여자가 내 애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치 내 뇌에서 뽑아가는 것처럼. 헤어진 다음에야 이름도 email 어드레스도 묻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맥주를 평소 보다 많이 마신 탓이다. 맥주를 많이 마셔서 평상시 보다 심한 '될대로 되라' 상태였던 것 같다.

나처럼, 아무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그러나 흥미진진한) 과학 분야의 얘기를 하는 주인공을 어떤 소설에서 보았다. 소설의 작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 이름은 너무 복잡해서 잘 기억하기 어렵다. 소설 제목은 `Go!`였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는 '갈 데까지 가보자' 스피릿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조총련계 민단계 재일교포 2세로 하와이 이민을 잠시 고려하다가 무국적자로 남기로 작정했다. 소설은 사랑 얘기였으나 사랑 얘기는 시시했고 그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주제(갈 데까지 가보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화 되기도 했고 주연배우 이름 때문에(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고 싶었다. 주연배우는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딱이었다. 주인공은 치킨 레이스를 즐기는 양아치였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얘기가 날씨 얘기다. 스트랜저 대 스트랜저로 만났을 때 서로의 뻘쭘함을 없애려면 날씨 얘기만큼 환상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가 4개 국어로 모자라 손짓, 발짓을 사용하여 날씨 얘기를 하게 된 동기는 그것이었다. 폭풍을 온 몸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좋았던 원숭이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피차 말이 안 통할 땐 날씨 얘기 같은 것은 할 짓이 못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몰디브의 어떤 환상적인 섬(수퍼, 양변기, 화장지로부터 해방된 무인도)에 함께 가서 아담과 이브가 되자고 꼬시는 메일을 써봤다. 그냥 장난이다. 나는 가고, 이브는 이브의 인생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은 걸음 걸음마다 목숨을 건 글자가 될 것이다.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기간: 2001.10.13 ~ 21 (9일간)
일정: 방콕(2박)-꼬 따오(3박)-방콕(2박), 나머지는 길에서 버린 시간
숙소: 호텔(2박, 17만원), 방갈로(3박, 250밧, 300밧), 도미토리(2박, 90밧)
여행경비: 항공권(42만원), 호텔2박 조식포함(둘이 합쳐 17만원), 체류 비용 1인당 150$, 합쳐서 300$
1일 평균 경비: 2인 3만원
mamdb.xls

가계부 엑셀 파일


평균기온: 섭씨 33도.
 
M&A 합병인지 뭔지로 인생에 흥미를 잃은 프로그래머는 어느날 여행을 하고 싶다고 전화 주셨다. 사실 그가 의미했던 것은, 지금 생각이지만, '타일랜드 섹스 관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 잘못 골랐다. 지친 영혼과 육체를 편안하게 쉬게 하는 방법 중 최고는 그저 빡세게, 아무 생각없이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얽힌 길에서 헤메고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며 부대끼는 사람들과 통하지도 않는 말로 우왕좌왕, 횡설수설 하다보면 모처럼 시간내서 염세, 허무주의에 탐닉할 시간이 없어 약간 서운해 질지도 모르겠다. 빡세게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머리통을 텅 비우는데 남다른 재주와 소질을 가지고 있다면 의자에 앉은 채로 상상의 도시를 여행하고 상상의 짐승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스트가 말했다. '아, 나는 내일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노라' 라고.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이야말로 한 번도 가지 않고 남겨둔 길을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를 위해 스페샬 트래블링 어댑테이션 코스를 마련했고 여행지에서 자력갱생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오래 전, 나에게 회춘을 가져다 준 여행과 그 기쁨을 그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무척 쓸데없는 짓이지만 그에게 여행 코스를 잡아주고 준비물 따위를 알려주었다. 준비물은 그간의 경험으로 드라마틱하게 단순해진 상태였다. 칼, 라이터, 빤스 두 장, 티셔츠 두 장, 반바지 한 장, 스포츠타월 한 장, 칫솔 하나, 정로환 당의정, 샌달, 끝. 더이상 준비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Q: 나머지는요?
A: 현지조달.
옷과 신발만큼은 국산이 최고다. 그리고 항공권을 예매해주었다. 예매하다가 실수로 내 것도 함께 해 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회사에 휴가를 가겠노라고 말했다. 휴가지, 또는 비상연락망 칸에다가 대충 국내의 아무 도시나 써놓고 떠나는 당일까지 내색하지 않고 지내는 등, 나름대로 정성스레 사기 행각을 벌여 사람들을 안심케 했다. 42만원짜리 항공권, 단지 동행을 안심시키기 위한 17만원짜리 호텔 스윗룸 2박 예약(미친 짓이다), 300달러의 경비. 나는 그에게 여행의 진수를 가르쳐 주면서 그를 뜯어먹으며 빌붙어 다닐 예정이기 때문에 262$만 준비했다. 지나치게 많이 준비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중 70$ 이상이 '쇼핑'으로 날아갔으니 실제 경비는 나나 그나 160$ 안짝이 되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쌀 것도 없었다. 여행 전날밤 술 먹고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후다닥 싸 버렸다. 심지어는 배낭 대신 조그만 가방에 되는대로 쑤셔놓았다. 떠나기 전날밤 술을 엄청 마시고 나랑 사귀고 싶다는 여자의 청을 거절했으며 그리고 더 마시고 또 마시고 낄낄낄 웃다가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회사일을 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프로그램을 여덟 개 짰고 그와 관련된 다큐먼트를 다섯 개나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회사를 그만둬도 충분할 정도로 뒷정리를 깔끔하게 해 두었다. 이 김에 회사 관둘까? 아침 10시에 출근이라니. 너무하잖아! 마지막으로 몇몇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제가 생기면 어디어디로 email을 보내주십시오.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읽겠습니다.
 
썰렁한 거리를 지나 5500원짜리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코드 네임 불스, 나의 동반자, 내가 뜯어먹어야 할 시니어 펠라,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상기해 볼래도 기억나지 않는 불행한 프로그래머, 수년간의 독특한 경험을 통해서도 프로그래머의 길을 깨닫지 못한 채 여자친구 하나 없이 방황하는 바보천치, 그것은 과거의 내 모습이었다. 불행의 제곱. 악운의 내추럴 익스포넨셜.
 
그에게 모든 재량을 맡겼다. 나는 뒷짐을 진 채 그가 하는 꼴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를 따라 보딩 패스를 받고 커스텀을 통과하고 패스포트 컨트롤을 지났다. 그는 빌어먹을 라덴 덕택에 엊그제 샀다는 스위스제 빅토리녹스 나이프를 항공사에 빼앗겼다. 그에게 가이드북 알기를 죄수의 잠자리 맡에 놓인 성서처럼 소중히 알라고 꼬치꼬치 설교를 늘어놓고 비행기 스튜어디스의 외모를 흉보면서 브랜디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모포를 슬쩍하라고 음흉하게 충고했다. 계곡에 앉아있는 선생처럼 말했다. 우리 함께 철저히 어글리 코리안으로 행패나 부리자. 라고. 사실 그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돈 무앙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내 이름과 가련한 프로그래머의 이름이 적힌 피켓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황송할데가... 우리는 뒷문을 열어주고 짐을 짐칸에 넣어주는 리무진을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광활한 욕조에서 호강을 예감하며 첨벙이다가 옷을 갈아 입었다. 심지어는 객실에 리셉션 룸이 있었고 TV가 두 대나 되었으며... 5단 레버가 달린 에어콘이 있었다! 전등 스위치와 에어컨은 침대 맡에 있는 작은 탁자 위의 컨트롤러로 직접 제어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는 호텔 수영장이 보였는데 홍수에 휩쓸린 돼지처럼 사람들이 둥둥 떠 있었다. 햇살은 따가웠고 거리는 습기와 매연으로 가득차 있다. 우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하철 내부
 

여행할 때 즐겨입는 거지같은 옷으로 갈아입고 바로 짜두짝 주말시장으로 향했다. 짜두짝 시장에서는 온갖 짐승의 냄새가 풍겼다. 없는 물건이 없는 곳이다. 나는 주저없이 행주 끓인 냄새가 난다는 평이 자자한 팍치(향초)를 잔뜩 집어넣은 국수를 그에게 권하며 말했다. 먹어. 먹는다. 팍치 없이 태국음식을 먹는 작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설사끼를 느낀다길래 남 깽 쁠라우(로칼 워터 윗드 아이스)를 권하며 말했다. 마셔. 마신다. 설사의 가장 좋은 예방책은 배를 채운 후 죽어라고 걸어 억지로라도 소화시키는 것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살아있는 지식을 온 몸으로 생생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 그를 데리고 매연과 시꺼먼 이국인들로 가득찬 거리를 네 시간 넘게 걸어다녔다. 피부의 모든 땀구멍에서 소금기가 섞인 액체가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짜두짝 시장에서 나는 190밧 짜리 방수시계를 구입했다. 시계 뒷딱지에는 OK라고 씌여 있었고 후에 물에 담궜다 꺼내자 곧바로 물이 들어갔다. 대체 뭐가 OK란 말인가, 이 싸구려 시계야? 그리고 사랑하는 모자와 작별했으며 100밧 짜리 새로운 모자를 뒤집어 쓰고 닭똥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닭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꼬치구이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비록 내 눈알이 찌든 문명 속에서도 총기와 호기심으로 반짝이지만 늘 태국인, 아니, 태국 거지로 오해받았다. 옷차림으로 타인을 평가하려는 우둔한 사람들이 내면의 풍만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발생하는 불상사였다. 어떤 때는 피부 가죽을 벗기거나 두개골을 드러내 30여년 동안 잘 손질한 정원처럼 촘촘하고 꼬불꼬불하게 얽혀있는 대뇌피질을 보여주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대신 그들은 자비와 연민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거리에 앉아있는 내게 동전을 던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장에서 산 싸구려 짜가 시계
 

거리에서 한 외국인이 다가와 내게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동전을 짤랑이며 고개를 끄떡였다. 팟뽕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서 오늘 저녁 거기서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남자들끼리만 아는 음흉한 미소를 교환했다.
 
MAM pro로 경비를 하나하나 적어 나갔다. 하루에 1000밧씩 쓰기로 결심했다. 평소에 내가 태국에서 쓰는 돈은 많아봤자 150밧(4500원) 정도였다. 도미토리의 꾀죄죄하고 구석진 침대와 시장 골목에서 파는 국수와 덮밥, 그리고 약간의 과일과 꼬치로 호사를 누렸으며, 다섯 개의 구멍난 시트가 한 줄에 달린 비꺽이는 로칼 버스나 3.5밧짜리 시내버스만 타고 다녔던 것이다. 그랬다. 나는 태국인들처럼, 아니 때로는 태국인들보다 더 거지같은 생활을 했지만 언제나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알았고 또한 오크통속에서 이를 잡고 살아가는 그리스 철학자처럼 따뜻한 햇살에 씨익 웃음 지을 줄 알았다. 그런 나에게 1000밧은 실로 엄청나게 큰 돈이라서 어떻게 써야할 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건물 마다 붙어있는 사당에서 꽃과 양초와 향을 사서 절을 하는 행인들
 
저녁에 팟뽕에 갔다. 스테이지에서 홀라당 벗고 기괴한 아크로바트 (쑈라고 한다)를 하는 여자들을 무미건조하게 쳐다보다가 예쁘장한 여자가 보이면 제스쳐를 취했고 그러면 옆에 와서 앉았다. 내 테이블에는 한 병의 씽 맥주와 콜라가 한 잔 놓였고 불스의 테이블에는 다섯잔의 콜라와 맥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콜라 잔 수만큼 홀딱 벗은 여자가 테이블에 앉는다. 불스 주변에는 발가벗은 여자 다섯이 엉겨 붙었는데 그중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 친구랑 노는게 재미 없는지 내 곁에 와서 값싼 미소를 흘리며 몸을 더듬었다. 내 이름을 묻는다. 루크. 네 이름은?
 
스테이지 앞에는 서양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앉아 있었다. 갑자기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정육점에서 전시되고 팔리는 고깃덩이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여자들, 싼 값에, 단지 콜라 한 잔에 희롱 당하고, 단돈 1000밧(2만 5천원)에 남자에게 몸을 내주며 밥벌이를 하는 태국여자들의 불행 또는 당신의 문명이 선사한 바이어스된 공정함이 지닌 시선 때문이리라. 남자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통곡과 내 즐거움은 우주끝까지 완벽한 평행선을 달려갈 것이다. 섬세하고 가느다란 머릿결, 부드러운 갈색 피부, 아름다운 눈동자, 오래전부터 팔리는 여자를 사서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여자들이 나랑 자려면 그들이 오히려 내게 지불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오만한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가치를 잘 알고 있다.
 
쑈가 끝날 무렵 반쯤 정신이 나간 불스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키스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꼬치 몇 조각과 시원한 맥주로 배를 채웠다. 불스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나는 10분 정도 책을 잡고 있다가 바로 골아 떨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맥주와 꼬치 안주, 태국산 담배
 
하인라인의 책 제목: have a space suit, will travel. 오래된 옛말: 음식이 입에 맞는다면, 여행은 내내 즐거울 것이다. 불스는 호텔에서 주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객실을 나오기 전 룸메이드에게 주는 20바트의 팁이 아까워 do not disturb 전등을 켜두었다. 불스는 어글리 코리안의 행태에 실실 비웃음을 지었다. 호텔 프론트에는 신혼여행을 온 관광객들, 주로 한국인들이 북적였다. 호텔을 나오자마자 6시간쯤 쉴새없이 걸어다녔다. 불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경복궁, 창경궁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와서 남의 나라 왕궁을 몇 시간씩 걸어다니며 입을 헤 벌리고 땀을 구성지게 흘리면서 열심히 구경하고 있다는 점이 꽤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집니다. 그런가? 나는 하나도 안 이상한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각기 다른 시기에 세운 세 개의... 모르겠다. 묻지마 역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숭이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짜 금은 아니겠지 설마
 
에메랄드 사원이었다. 수백만 개의 색유리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사원. 나는 사원에서 태국인들 틈에 끼어 앉아 금부처에게 향을 피웠다. 얼마나 한국인들이 오락가락 했으면 거기 안내인이 내 머리를 가르키며 '모자' 라고 말했다. 모자 벗으라는 뜻이다.
 
거대한 와불이 있는 왓 포에서 만난 사기꾼을 데리고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잘 놀았다. 즉, 필요한 정보를 뽑아낸 다음, 헌신짝처럼 그를 내팽개쳤다. 불스는 내가 외국인하고 대화를 할 때나 삐끼들을 희롱할 때면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리고 간단히 한 마디 했다. 영어가 딸려서요. (누군 안 딸리나?) 그 놈들이 내게 다가와서 한 말은 그런 것이다. 그런 복장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알고 있어. 오늘은 왕궁이 쉬는 날이다. 알고 있어. 넌 운이 좋은 편이다. 오늘만 특별히 문을 여는 곳인데 거기에 데려다 주겠다. 난 보석에 흥미없어. 아팃 선착장이 어느 쪽이지? 저쪽. 카오산까지 가려면 얼마야? 10밧 줄께 갈래? 30밧은 줘야 한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원 입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왓 포 사원의 정원. 음. 태국인 가족을 찍고 말았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왓 포 사원: 무시못할 중국의 영향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빛나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팔뚝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들 이러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투파 라고 해야 하나?
 

왕궁 앞에 건널목에서 꼬마 아이가 '옵빠, 만원에 열깨!'를 외치며 왠 악세사리를 팔려고 졸졸 따라왔다. 안 산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따라오게 내버려두자 슬슬 갯수가 올라가 '옵빠, 만원에 이씹깨!'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 불쌍하고 물기에 젖은 눈망울 때문에 잔인하게 대하기가 어렵다. 수박을 사먹으면서 권해주었다. 거절하며 소리친다. '만원에 오십깨!' 고개를 저었다. 악세사리에 취미 없다. 아이는 실망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크게 결심했다는 듯이, 그리고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일부분 손해를 감수할 각오를 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다. '그럼 옵빠, 만원에 아홉개!' 만원에 아홉 개? 못내 웃음을 참고 아이를 남겨둔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짜오프라야 강을 횡단하여 해부학 박물관에 들렀다. 신체를 종횡으로 잘라놓은 것들이 눈에 띄었고 다양한 샴 쌍둥이 시체가 커다란 유리병에 들어 있다. 어떤 아기 시체는 반을 갈라놓아 지독하게 적나라했다. 피부를 벗긴 남녀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보기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부해 놓은 여자 시체: 발치에 꺼내놓은 내장이 보인다.
...
사진 못 찍게 하는 곳이지만 어글리 코리안은 추태를 부렸다
 
법의학 박물관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강간살해범을 목매달아 죽이고 미이라로 만들어 유리관에 전시해 놓았다. 완전히 말라붙지 않은 미이라에서 진액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 옆에는 그가 살해한 여자의 피묻은 옷가지와 공구가 걸려 있었다. 총알이 관통한 해골바가지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감탄스러운 것은 두개골을 관통한 어떤 시체의 머리를 잘라 총알의 궤적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 전체를 횡으로 절단하여 정수리에서 후두부에 이르는 대뇌의 피해를 보여준 전시물이었다. 그외 기차사고 시체들, 교통사고 시체들, 익사체들, 트럭 밑에 깔린 오토바이 사고 시체, 다양한 거리(밀착, 10cm, 20cm, 원거리 사격)에서 총 맞은 시체들, 조개에 뜯어먹힌 시체, 철사줄에 목이 잘린 것들, 도끼에 찍힌 것들, 번개맞은 시체 등등 다소 식상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다시 걸었다. 온몸이 땀에 절어 허연 소금기가 팔다리에 사뿐히 앉아 태양 빛에 반짝일 때까지 걸었다. 지독한 고통 뒤의 쾌락을 상상하면서. 물어물어 시간당 100밧 한다는, 여자를 직접 고를 수 있다는, 은밀한 밀실에서 맛사지를 해준다는, 태국인들만 들락거린다는 맛사지 가게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태국섹스관광에 나선 한국인처럼 들어갔다. 그야 물론 가장 예쁜 여자를 동행보다 재빨리 골랐으며 그 여자가 세숫대야를 들고와 발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힐 때까지 밀실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음탕한 기대감에 젖어 있었으나, 온 몸의 뼈가 재배치되는 고통스럽고 일견 환희에 찬 두 시간이 화살처럼 흘러갔을 뿐이다. 온갖 기괴한 맛사지가 끝날 무렵, 모든 뼈 마디와 근육이 고통스럽게 비꺽였지만(그녀는 가냘픈 몸매에도 불구하고 힘이 엄청나게 쎄다) 나는 처음으로 허리와 팔 다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방향으로 꺽일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받아본 어떤 마사지보다도 뻑쩍지근했으며 다음에 또 하러 와야겠다는 굳은 결심과 더불어 눅신한 뼈마디, 근육 때문에 거리에서 픽 쓰러지기 전에 어서 빨리 아낌없이 돈을 투자해 배 불러 먹고 버스라도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단 하루 반나절 동안 모토 싸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통수단을 다각도로 이용했다. 모두 불스를 위한 일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저 걷거나 값싼 버스만 탔을 것이지만, 불스를 위해서 2박에 무려 17만원이나 하는 값비싼 호텔, 그것도 스윗룸에 묵었던 것은 그에게 '적응'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태국은 그나마 나은 나라다.
 
카오산에 들렀다. 벌써 여섯 번째인 것 같다. 여전한 동네에서 새로 생긴 한국인 가게에 들러 섬으로 가는 조인트 티켓을 예매하고 도미토리를 둘러 보았다. 홍익인간과 만남의 광장에는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번, 저번 여행 때 신세를 지고 괜히 미안한 김에 맛대가리 없는 한국음식을 시켜 먹느라 오히려 경비가 더 많이 깨졌다. 게시판에서는 홍익인간의 불친절함이나 그들이 제시하는 관광 패키지에 대고 이런 저런 욕들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일에 끼어들어 지저분해지고 싶지도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랏차담넌 거리에서 만난 행렬
 
저녁에 다시 고기들이 춤추는 나나 플라자로 향했다. 팟뽕에 비해 여자들이 훨씬 예뻐서 몹시 기뻤지만 쑈는 별볼일 없다. 특이한 것은 늙은 서양인들과 한국인들이 많이 눈에 띈다는 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구나 싶을 정도로 몸매와 얼굴, 특히 가슴이 예쁜 아가씨를 옆 자리에 앉혔다. 그녀는 줄기차게 자신의 양 부모가 중국인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녀의 피부는 타이족처럼 검거나 갈색을 띄지 않았다. '하얀 피부'에 대한 강박적일 정도의 집착이 이 나라의 미적 기준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 내 옆에 앉아 있던 애는 스물한살 먹은 치앙마이 출신의 귀여운 소녀였다. 가슴을 건드리면 놀라 몸을 떨면서 웅크리는, 한 눈에 봐도 수줍은 처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여자애였다. 물론 남자친구가 없다. 그 가게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지 2개월이 안 되었고 경험이 부족해 스테이지에는 아직 서지 못했으며, 바깥에 자러 나가지 않는 등등. 그 아이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미소를 지녔다. 그 아이처럼 이 여자도 한국인 친구를 가지고 있다며 쪼르르 달려가 그가 남긴 메모를 소중한듯이 가방에서 꺼내 보여준다. 주소와 이름,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 있다. 흠. 그렇군. 그러면서 자기는 좀 비싸다고 말한다. 24세 미만은 2000밧, 이상은 1000밧짜리 인어들. 불스의 눈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말이 적혀 있었다; 다음 번에는 혼자 와서 몸을 아끼지 말고 여자들을 정말 즐겁게 해 줘야지! 과연 그렇게 될런지는 의심스럽다.
 
공무원처럼 보이는 한국인이 경직된 표정으로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즉시 여자를 나꿔채 바깥으로 나간다. 다소 메스꺼운 기분이 들었다. 스테이지 주변에는 순하게 생긴 나이든 외국인들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 하나둘씩 여자들을 데리고 나간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인이 하나둘씩 꾸역꾸역 들어온다. 더 꼴보기기 싫어(아니 자신이 싫어져) 가게를 나왔다. 맥주값과 콜라값을 합쳐봤자 150밧 정도였다. 곁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따라 나왔다. 불스는 미적거리며 가게 안에서 계산중이다. 바깥에 나와 삐끼와 함께 호객행위를 했다. 지나가는 양키들에게 커튼을 들쳐보이며 이 가게가 나나 플라자에서는 최고라고 설명했다. 가게 이름이 G-spot이다. 문 옆에 서 있던, 자기 일을 빼앗긴 삐끼가 낄낄낄 웃는다.
 
내 곁에 앉아 있던 중국인 집안이라고 우기던 여자애,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만한 미모를 지닌 여자가 커튼으로 알몸을 가린 채 바깥으로 몸을 비쭉이고 나를 최저라고 귀엽게 욕하고 있었다. 여행중 내내 기억에 남았다. 평생 예쁜 여자들을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옆 가게의 여자가 갑자기 다가와 팔을 크게 벌렸다. 그녀를 껴안았다. 커튼 속에서 목만 내밀고 있던 중국인 아가씨, 유이는(그 여자의 이름) 토라졌는지 홱 고개를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에게 함께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궁색하게 늘어놓은 핑계는, 내게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개소리였다.
 
밤이 오고, 거리에 슬슬 보슬비가 내린다. 불스를 데리고 아랍인 거리로 향했다. 한 카페는 전등을 켰건만 사람들이 시꺼매서 불이 켜진 것 같지가 않았다. 눈알과 이빨이 껌뻑이고 있었다. 아랍인 거리 맞은편에는 이스라엘 대사관이 있다. 얘네들은 사이도 안 좋으면서 붙어 다니는데 전혀 불편함을 못느끼는 건지 원... 카오산에서는 라덴의 초상화가 그려진 티셔츠가 가게 곳곳에 걸려 있는데, 서양인들중 그 옷을 사서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 없다. 오래전부터 새뮤얼 헌팅턴의 관점에 다소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었다. 꾸란은 자비로운 '성서'다. 알면 알수록 친근감이 드는... 언젠가 아랍어를 배워 그들이 그다지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꾸란과 하디스의 운율을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
 
수쿰윗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특히 빨간불이 켜진 곳만. 거리의 한 호텔 앞에 서 있던 게이에게 헤벌쭉 웃어보였다. 그 또는 그녀가 나를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내가 불스에게 그가 게이라고 설명해주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고 거리에서 옷을 홱 벗겨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설명하기가 애매하지만 여장 남자와 여자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르다. 물리적으로 목젓이 보인다느니 걷는 폼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들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이 곧 올 것만 같다. 호텔로 돌아와 맥주와 닭고기를 먹으며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어제 빨았던 양말은 여전히 마르지 않았다.
 
일어나서 밥을 챙겨 먹고 카오산에 들러 불스에게 이곳 저곳을 가르쳐 주었다. 식당은 여기 여기,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여기, 숙소는 여기여기, 배를 타려면 저기, 술을 마시고 싶으면 여기, 위조 신분증은 여기에서, 환전은 저기 가서. 이런 식으로. 음식에 빨리 적응해 내심 안도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가 스스로 가이드북을 찾아 갈 수 있도록 뒷짐을 진 채 방관했다. 버럭 성을 내기도 했다. 모르면 저 사람들에게 물어! 그에게 말해주었다. 여행지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는 한낮 동안 이국 땅에서 반쯤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서울 지리보다 방콕의 지리를 더 잘 안다는 사실에 그다지 아이러니하다고 느낀 적도, 불편한 미소를 지어본 적도 없다. 론리 플래닛의 코리아 편과 서울 편은 상당히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것들을 거울 삼아, 달리 말하자면 가이드 북 가지고 어떤 도시를 여행한다고 해봤자 그곳을 이해하는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내가 방콕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거리를 지나다가 헌책방에 지남철처럼 끌려 들어가 무의식 중에 책을 몇 권 샀다. 정말 빌어먹을 팔자려니 하고 반쯤은 포기했다. 어떻게 책 읽는 것이 먹어대는 본능처럼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까. 다행히 나는 책벌레가 아니라는 점에 다소 안도감 내지는 자부심을 느꼈다. 아니 책벌레에서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된 점이 기특하기도 했다.
 
맡겨놓은 짐을 찾고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새벽녁에 춤폰에 도착. 벤치에 앉아 썽태우를 기다리는 동안 실없이 웃고 있는 미국인과 오스트리아인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놀랍게도 미국인 여자는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사건의 지극히 단편적인 일부만을 알고 있었다. 불스는 내내 외면한 채 다른 자리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재밌는 점은 오스트리아 연인이 미국인을 마치 벌레처럼 쳐다보며 그녀와 대화하기를 무척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그 불쌍한 미국인 아가씨는 지나치게 빠른 영어로 처음보는 나에게 자신의 인생관은 물론 별에별 얘기를 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재미는 있었다. 그녀가 섬의 남쪽 해변으로 간다길래 자동적으로 나는 동쪽 해변에 가서 수도승처럼 조용히 지내겠다고 말했다. 음... 그러니까... 이 미국인 아가씨의 수다와 함께 나흘 동안 같은 곳에 틀어박혀 있게 되면 우리가 꿈꾸던 조용하고 나른한 휴가는 물 건너가지 않겠는가?
 
나는 이 섬에 두번 째로 온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꿈 속에서 보았던 어렴풋한 기시감 따위를 느꼈다.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이 망할 놈의 동네가 '흥정'이 통하지 않았다는 악몽같은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하지만 불스와 나는 '돈'이 많다. 그래도 20밧 짜리 식사를 50밧에 할 생각을 하니 목이 메어왔다.
 
미니밴 짐칸에 짐짝처럼 부려졌다. 새까맣게 탄 여자애는 당신들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아주 끔찍스러웠을 꺼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동쪽 해변은 정말 조용하다고도 덧붙였다. 동쪽 해변에 가는 사람은 거기 짱박혀 살고 있다는 그녀와 나, 불스 단 세 명 뿐이었다. 30분을 기다려도 차는 정족수가 차지 않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편엽서를 붙였다.
 
정말 조용해 보였다. 아무도 가지 않는다니. 산길을 위태롭게 달려 섬의 동부 해안에 도착했다. 햇볕은 뜨거웠으며 '조용한' 동부 해변 답게 방갈로는 4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벙하게 해변에서 두리번 거리다가 다이빙 리조트로 들어갔더니 같이 차를 타고온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이것 저것 설명해 준다. 댕큐. 레스토랑 옆에서 방갈로를 잡았다.
 
대나무와 야자잎으로 얽어놓은 나무 방갈로 앞에는 뜨끈뜨끈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짐을 풀자마자 바다 속에 뛰어들어 고기떼부터 확인했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뿐인 레스토랑에는 몇몇 외국인들이 햇볕을 피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머리였고 팔 다리에 헤나를 새겨 놓았다.
 
불스는 물을 두려워했다.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을뻔한 경험이 있은 후로 수영은 커녕 물 속에 들어가는 일 조차 없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놀라서 입을 벌린 채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갖은 감정을 투사하며 살아가는 논리적이지만 비이성적인 세계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물에 뜨는 사람과 물에 뜨지 않는 사람. 충직하고 견고한 그의 믿음에 따르면 그는 후자에 속해 있었다. 밀실공포증 환자를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장롱에 갇혔다가 실신하고 깨어나자 마자 극도의 공포와 혼란을 느낀 나머지 다시 실신하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물을 두려워한다면... 해변은... 바다는... 아름다운 고기떼는... 가엾은 몽상에서 벗어나 정신 차리고 그에게 스노클과 핀을 빌려오라고 말했다. 나 역시 수영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죽지 않는 방법은 좀 안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조교 역할을 하기로 했다.
 
엉덩이까지 차는 물에서 입과 코를 막고 물속에 잠겨 있다가 숨이 차면 나오라고 말했다. 5초도 견디지 못하고 그 얕은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일어서는 가엾은 모습. 손을 대는 바위마다 손바닥이 타들어갈 정도로 뜨거운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 꽂힐 무렵, 그는 물속에서 30초 가량 버틸 수 있었다. 일어나서 허우적거리지 않게 되었다. 다음에는 몸을 해면에 수평으로 띄우는 것. 이짓거리를 제대로 하게 만드는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에게 고글을 뒤집어 씌우고 물 속에 잠수를 시키자 코로 물이 들어가서 또다시 허우적거렸다. 20분쯤 지나 고글과 맨몸으로 물 속에서 팔다리를 젓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30분이 흘렀다. 대롱을 꽂아 주었고 숨을 헐떡이는 것을 진정시키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동안 앞에 있는 작은 바위섬을 왕복하며 고기떼와 작년과 제작년에 못다한 대화를 마저 했다. 그들은 답례로 내 몸을 물어뜯었다. 엄청난 멸치떼가 그들의 작고 얇은 은빛 몸뚱이에 햇빛을 반사하며 마치 비이커 속에서 대류를 입증하는 톱밥처럼 경이로운 나선과 호를 그리며 움직인다. 바위섬에서 돌아올 무렵 그는 이제 물이 너무 얕아서 팔다리를 젓기가 불편하다는 투정을 늘어놓았다. 그의 가슴께, 그리고 목께까지 차는 곳에서 처음으로 자유롭게 물속을 왕복할 때 그의 얼굴에 즐거움이 꽃 피기 시작했다. 해먹에 누워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면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는 나를 믿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간만에 몸 좀 풀고 담배 한 대 빨며... 조개 껍질로 만든 재떨이...
산호로 만든 풍경... 바람에 흔들리는 해먹...
얼간이같은 표정
 
해먹에 익숙치 않아 굴러 떨어졌다. 매우 아프다. 그러나... 어제 받은 타일랜트 트래디셔널 뻑적지근 정통 맛사지 덕택일까? 온 몸이 놀랍도록 유연하다. greg bear의 darwin's radio 첫장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책만 들었다 하면 잠이 든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주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불스는 다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바위섬 근처는 수심이 대략 10여 미터 가량 되지만 물이 워낙 투명해 바닥이 선명하게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 바닥까지 내려가 보고 싶지 않냐고. 고개를 젓는다.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일 섬 주위를 돌며 스노클링 투어를 할테니 연습 잘 해 두라고 말했다. 배 위에서 수심이 깊은 곳으로 뛰어내릴 것이기 때문에 몇 가지 잔 연습이 남아 있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라이프 자켓을 입히지 않았다. 버릇 들면 물에 대한 공포심을 치유하기는 커녕 의존적이 되어 버리는 모습을 여러번 본 적이 있다. 저녁 무렵이 되어 그는 발이 닿지 않는 바다를 유영할 수 있었다. 그의 기쁨을 안다. 그래서 벌겋게 타들어가는 그의 등을 향해 깔깔깔 웃었다. 파도가 굽이치면서 파면은 수백만 개의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바위섬을 향해가는 수직으로 솟은 대롱을 볼 수 있었다. 돌아온다. 물을 뚝뚝 흘리면서, 발바닥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자신의 손바닥과 발가락에 산호가 남긴 상처에 개의치 않으면서 저기까지 갔다 왔어요 라고 말하는 녀석의 모습이 보기 좋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운데 보이는 점은 섬을 향해 나아가는 그 녀석의 뒤통수
 
샤워 하고 100미터가 안되는 해변 중앙에 있는 단 하나 밖에 없는 레스토랑에서 스팀드 라이스와 프라이드 치킨, 맥주 두 병을 사와 방갈로 앞에 주저 앉아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하늘 아래서 낄낄거리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불스가 말했다. 서울이 생각나지 않아요. 내가 뭘 했는지도. 고개를 끄떡이며 대꾸했다. 나도. 머리속에는 스위치가 있는 것 같다. 스위치가 켜지면 이전 일들이 생각나지 않고 오직 여행에만 신경을 썼다. 사실, 불스에게 거의 모든 거래행위나 대화를 시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방갈로 안에 기어들어와 제 집인양 밍기적거리는 고양이
 
졸음이 밀려온다. 파도 소리만 들릴 뿐 바다와 하늘은 깜깜하다. 저녁 무렵 끼기 시작한 구름 탓에 아직 별이 보이지 않는다. 방갈로 안에서 잠이 들었다. 불스는 지쳤는지 금새 곯아 떨어졌다.
 
새벽에 깨어났다. 마치 자명종처럼, 생각났다는 듯이. 새벽 2시 20분, 전기가 끊겨 팬은 멎어 있다. 전등 스위치를 딸깍였지만 쓸모 없다. 입가에 미소가 고인다. 원하던 바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깡촌 해변. 기대감에 젖어 문을 열고 사박거리는 모래밭을 걸어 고개를 쳐들었다. 적도 부근의 선명한 별들이 지평선부터 하늘 천정까지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뭄이다. 이 급작스럽게 사기 조작된 여행의 본래 목적은 정확히 그뭄때 모래밭에 누워 별들을 바라보며 잠이 드는 상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에... 또, 야자수 그늘에 누워 회사에서 보내온 절박한 email을 읽고 콧방귀를 뀌며 무시해보려는 의도가 약간 있긴 하다. 그런데, 어 시팔 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모래밭에 누웠다. 까칠한 산호 조각들이 등에 배긴다. 담배를 한대 물었다. 바이저를 꺼내 별자리를 확인했다. 로케일은 GMT+7, 방콕으로 맞추었다. 적당히 맞아 떨어진다. 하늘 천정에 오리온이, 플라이아데스가 반짝이고 있었다. 바이저의 액정을 껐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아침 무렵에깨어 방갈로로 기어 들어왔다. 룽기로 몸을 감고 따뜻하게 잤다.
 
햇살이 창밖으로 스며들었다. 파도 소리, 옅은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깨자마자 스노클을 들고 작은 백사장을 지나 바다로 나가 몸을 물에 담궜다.
 
'하나' 밖에 없는 레스토랑에서 먹어준 똠얌꿍과 카우팟꿈 맛은 최악이었다. 각기 새우가 세 마리 밖에 없었지만 seafood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채 상당히 높은 가격을 매겨 놓았다. 그래서 해변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스노클링 투어도 해야 하고.
 
갯바위 바깥쪽 바다는 몹시 깊었다. 바윗 그늘 아래는 어두워서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불쑥 불쑥 물고기들이 튀어 나왔다. 수온이 다르고 물결이 높다. 발질을 멈추고 가만히 뜬 채 고기들이 모여들 때까지 기다렸다. 머리속에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저 깊은 바다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욕망을 억눌렀다. 갯바위로 기어 올라와 햇빛을 쪼였다. 해변이 저 멀리 보인다. 하루에 두어 차례 동부 해변을 왔다갔다하는 배가 오고 사람들이 움직인다.
 
짐을 꾸렸다. 양말은 여전히 마르지 않았다. 맨발로 다니기에는 모래사장이 너무 뜨겁다. 동부 해변을 떠나는 사람은 여섯. 우리는 해변 중앙에 꽂혀 있는 팻말의, 하루에 네 차례 밖에 없는 차 시간에 맞춰 미니 밴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짐짝처럼 부려져 서부 해안의 중심 반 매핫에 도착했다. 길이 가파라 가끔 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부 해변
 
선착장에서 섬 주변 스노클링 투어를 흥정했다. 끈질긴 노력 끝에 800밧에서 400밧 까지 떨구어 놓았다. 숙소를 잡고 다시 돌아올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북서부 해안으로 향했다. 숙소를 잡고 스노클 장비를 빌리고 오토바이를 빌리기까지 한 시간 반이 흘렀다. 숙소가 마음에 든다. 정원을 예쁘게 가꾸어 놓았다. 비수기라 방이 펑펑 남아 돌았다. 그런데 불스가 물을 두려워 한다고 말했을 때 지었던 멍청하고 얼빠진 표정을 다시 한번 지어야 했다. 오토바이를 몰 줄 모른다고 말한다. 오...오토바이는 그럼 왜 빌린거지? 이동하기 불편하잖아요.
 
우리는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다. 시동 거는 것부터, 기어 변속에 이르기까지, 현지인들의 낄낄거리는 웃음 속에서. 내가 말했다. 자이로스코프 있잖아. 빨리 돌수록 안정적이지. 그래서 우리는 액셀을 밟았다. 왼쪽에 핸들이 달린 그들의 차선에서(차선 같은 것은 사실 없었고 도로의 절반은 비포장이었다) 왼쪽으로 달리는 정신나간 짓을 하며 간신히 선착장에 도착했다.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공포 만큼의 스릴이 있었다. 특히나 타이어가 고갯마루에서 붕 떠서 잔인한 중력의 사슬에서 잠시 벗어났을 때는 기분이 정말 죽여줬다. 뒷 브레이크가 있는 지도 모르고 앞 바퀴 브레이크만 써서 빗물로 골이 푹 파인 경사 30도의 길을 무작정 내려가 본 적이 있는가? 오직 내가 믿었던 것은 자이로스코프의 원리 뿐이다.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스키드 자국은 3cm 두께로 퍽퍽 파였고 오토바이가 한동안은 미친 말 같았다. 차선이 헷갈려서 골치가 아팠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동안 우리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는 흔히 이런 것들 뿐이다: 오오... 어어... 으아악... 정신차려! 자이로스코프를 떠올리라고! 회사도 망했잖아?
 
선착장의 보트 택시 기사는 '늦었어' 라고 간단히 말했다. 한숨을 쉬었다. 투어는 '말 그대로' 물 건너갔다. 기사는 이미 꼬 낭유안까지 가는 승객들을 여럿 모아놓았다. 할 수 없이 꼬 낭유안 섬까지 그 조그만 배에 아홉 명이 달라붙어 타고 갔다. 자리가 비좁은 관계로 한쪽 다리를 수면에 걸쳐 놓았다.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바다속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인다. 난 이 택시 기사를 알고 있다. 2년 전에도 이 아저씨의 보트를 타고 꼬 낭유안에 갔다. 이빨이 다 빠져서 웃을 때는 합죽이 같았다. 그동안 돈을 벌었는지 빠진 이빨 사이에 덜그럭거리는 이빨을 달아 놓았다.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스노클링에 쓸데없는 자신감이 붙은 불스는 핀 없이 물 속에 뛰어들었다. 깜빡 잊고 말을 안해 주었다. 1미터 정도만 나가면 푹 꺼지듯이 수심이 깊어지는 이 섬 주위에는 해류가 있다. 게다가 밀물 때다. 그는 저만치 떠내려가다가 안간힘을 쓰며 물 위로 대가리만 간신히 내민 채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걸?'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 때문에 구해달라고 소리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귀찮아서 던져두었던 핀을 달고(해류에 휩쓸리지 않게) 상당한 스피드로 달려가 그를 구출했다.
 
한국인 셋을 발견했다. 굉장한 자신감을 가진 채,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불스는 그들이 구명의를 입고 오리처럼 둥둥 떠다니는 모습에 콧방귀를 뀌었다. 낭유안 섬 주변은 지독하게 물이 맑다. 옅은 에머랄드 빛 수면 아래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온갖 종류의 열대어들이 유유자적 헤엄친다.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고기들이 정강이 주변에서 놀았다.
 
해가 진다. 멋있다. 멍하니 앉아 지는 해를 구경했다. 사람들은 거의 떠나고 해변에는 아무도 없다. 불스가 옆에 다가와 한 마디 했다. 여긴 여자랑 같이 와야 하는 곳이에요. 섬으로 돌아오는 길에 곳곳에서 바베큐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문득 email을 한번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녁은? 물론 과하게 먹었다. 이번에는 그릴에 구운 생선과 굴 소스로 조린 고기, 그리고 쌀밥을 먹었다. 맛있다. 괜찮은 식당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비용은 장난이 아니었다. 저녁 한끼에 둘이 합쳐 250밧이나 되었다. 커다란 생선 두 마리가 140바트.
 
가게에서 빈둥거리던 고양이들을 생선 냄새를 맡고 정신없이 몰려 들어와 식탁에 기어 오르려고 아우성을 쳤다. 얼룩 고양이와 살쾡이처럼 생긴 놈, 그리고 흰색 고양이다. 그들의 아우성에 견디다 못해(고양이 꼬리가 다리를 스칠 때면 간지럽기도 하고 소름이 흠씬 끼치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고기를 한점 뜯어서 던져주자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는다. 나무 바닥에 떨어진 고기 한 점을 두고 살쾡이와 흰 고양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꼼짝도 안 하고 서로를 노려본다. 마치 죽음의 결전을 앞둔 사무라이들 같다. 그러길 3분여,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장의 한 복판에 갑자기 얼룩 고양이가 생선 조각을 채가려고 슬쩍 앞발을 내밀자 살쾡이가 앞발로 그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친 후 생선을 물고 달아난다. 그리고 양 앞발 사이에 생선을 끼고 두 녀석을 노려보며 천천히 생선을 뜯어 먹는다. 우리는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모양을 꾸준히 '관찰'했다. 고개를 돌리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바다가 보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레스토랑에는 우리 말고 손님이 아무도 없다. 꼬 따오의 남쪽 해변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이 생각났다. 그때는 매일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주인이 내 얼굴을 기억했다. 그 식당에 들어가면 주인이 반겨 주었다.
 
처음보다는 한껏 발전된, 그러니까 능숙한 기술로 오토바이를 몰고 숙소 부근으로 돌아갔다. 포장도로에서는 그가 몰고 비포장은 내 전문이다. 나는 오토바이를 몰면서 자이로스코프의 원리만 죽어라고 생각했다. 비까지 내려주셔서 도로 상태는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오토바이를 둘이 몰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옆으로 태국 꼬마들이 오토바이를 몰고 쌩하니 지나친다. 밟으면 겁나고, 그래서 매우 쪽팔린다.
 
숙소로 돌아와 맥주를 마셨다. 불스는 맥주 하나로 할 일 없이 두세 시간을 때울 수 있다는 사실에 문득 놀라워하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익숙해진 사실을 그 덕택에 새삼 깨닫고는 했다. 이를테면, 우리가 뭔가를 먹을 때는 주위에 각종 짐승들이 몰려왔다. 그가 그 점을 지적했다. 닭, 개, 고양이, 이상하게 생긴 새 등등. 비가 온 후 주위에서 개구리들이 울기 시작했다. 괴상하게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앞 방갈로에는 레즈비언 둘이, 옆에는 호머 둘이 있었다. 비좁은 해먹에 둘씩 끼어 앉아 있는 모습은 정답고 다정해 보이기 보다는, 그냥, 불편해 보인다. 해먹에 누워 있으면 등짝에 그물 자국이 난다. 그래서 원양어선에 잡힌 참치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숙소 앞. 여자 둘이 놀러왔다
 
새 날이 밝았다. 시내에 또다시 오토바이를 몰고 나가 조그만 식당에서 그리운 물국수를 먹고 그리운 꼬치를 먹었다. 어제 본 한국인들이 미니 밴을 타고 남부 해변 쪽으로 가는 길에, 눈이 마주쳤다. 나를 쳐다본다. 숙소를 알면 모여서 술이나 한 잔 하고 싶은데. 음... 그 친구 말고, 그 친구 일행인 한국 여자 둘과.
 
시내에서 빈둥대다가 엽서를 부쳤다. 여행지에서 엽서를 부쳐 약올려도 괜찮은 사람들의 주소를 늘 바이저에 적어두고 다녔다. 인터넷을 조금 사용했다. 누군가 가게 창문에 '한글을 사용할 수 있어요' 라고 붙여 놓았다. 글씨를 잘 썼다. 한글 IME가 설치되어 있어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한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부 해변의 우리 숙소, 빌린 오토바이
 
내일 떠날 배를 예약하려고 가격을 알아보았다. 스피드보트는 500밧, 익스프레스는 400밧, 슬로우보트는 200밧이다. 춤폰에 도착하는 시간 차이가 한 시간 밖에 안 나서 슬로우보트를 예매했다. 돈 굳었다.
 
해변으로 돌아왔다. 하루 더 있을 생각이었지만 불스는 쇼핑을 하고 싶어했다. 불스에게 스노클링 마지막 트레이닝을 '지도'하면서 나도 연습할 것이 좀 있다. 수면에서 깊숙이 잠수해 바닥에 닿았다가 다시 떠오르는 것. 주변에서 깡통을 하나 찾아내 얕은 바다에서부터 깡통을 던져 물어오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야자열매를 불스의 머리통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뜨는 것보다 가라앉는 것이 더 어렵다. 요령이 붙어 왠만큼은 바닥까지 내려가 깡통을 나꿔채 수면으로 떠오를 수 있지만 체력 소모가 심하다. 지나치게 격하게 움직이다가 실수로 코가 땅에 부딫혔다. 제기랄.
 
두세 시간의 격렬한 연습을 끝내고 점심을 먹을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노클링 투어는 갑자기 물 건너갔다. 바다에 비가 떨어졌다. 오전의 심한 운동 때문에 스노클링은 접어두고 숙소에 앉아 얌전히 책을 읽었다. 귀에 물이 들어가서인지 주위에서 희안한 소리가 들린다.
 
개들이 몰려왔다. 가는 음식점, 숙소마다 그 지역의 개, 고양이들이 방문해 주셔서 얌전히 앉아 기대감으로 눈빛을 반짝였다. 먹다남은 과자를 던져주었다. 사실 이 과자는 고기들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엊그제 고기들이 한참 주둥이로 온 몸을 쪼아서 과자를 던져줄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는 시간 내서 두세 시간쯤 책을 읽었다. 비가 오려고 해서 서둘러 식당을 찾아 나섰지만 시간이 아직 이른지 싸이리 해변에는 먹을만한 식당이 보이지 않아 걷다보니 선착장 부근까지 오게 되었다. 식당에서 noname(묻지마)이란 메뉴를 찾아 주문했더니 새우와 생선과 닭을 밀가루에 발라 튀긴 것을 한 접시 그득 갖다 준다. 역시 고양이들이 몰려왔고 어제처럼 쟁탈전이 벌어졌다. 아... 배불리 먹고 시내에서 마침 보이는 꼬치 장사를 발견해 꼬치와 오징어 구이, 그리고 과일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 맥주와 함께 먹었다. 배불리 먹고 음식이 남아 개들에게 던져 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짐을 메고 낑낑거리며 선착장까지 걸어갔다. 적어도 30분은 걸리는 거리다. 이 섬에 와서 처음 먹어보고 불스를 감동시켰던 바미를 먹으며 마지막으로 섬을 둘러싼 푸른 바다를 바라 보았다. 우리가 타려는 슬로우보트는 어수선하고 지저분한데, 그걸 타고 가려던 몇몇 서양인들은 발길을 돌린다. 바다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멍하니 안개에 휩싸인 채 섬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배 타고 다섯 시간 걸려서 춤폰에 도착, 불스와 나는 몇 마디 주고 받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버스를 예약하고 30분쯤 남은 시간 동안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동안 옆 가게에서 타이거 밤을 사려고 애썼는데 이빨 없는 할멈이 타이거 밤 대신 원숭이 밤을 주거나 고양이 밤을 줘서 기분이 매우 우스웠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내가 앉은 좌석에 불을 켜 주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틀 만에 원서 한 권을 떼었으니 웬간히 책 읽는데 이력이 붙은 셈이다. 불스는 가이드북과 바이저 엣지 달랑 하나 들고왔다. 크래들을 안들고 와서 충전식인 엣지는 사흘이 안되어 전원이 거의 바닥났다. 전지를 사다 갈아 끼울 수 있는 내 구닥다리 바이저가 여행 중에는 훨씬 잘 어울린다.
 
남부 터미널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다 되었다. 불야성을 이룬 카오산까지 택시를 타고 돌아와 이지 투어의 도미토리에 투숙. 밤 늦은 시간이라 샤워도 못하고 그냥 잤다. 뱃전에서 비를 맞고 떨었더니 감기 기운이 돌았다.
 
아침 일찍 죽을 한 그릇 먹고 월텟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오후 4시에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불스는 7000밧이 남았고 나는 4000밧 이상 남았다. 남은 돈을 환전하면 10여만원 가까운 돈이 되지만 오늘은 마음 잡고 평생 해 본 적이 없거나, 또는 괴로운 실패의 역사로 점철된 '쇼핑'이라는 것을 하기로 작정했다. 빠두남 시장과 나일럿 시장, 나라야 판, 이세탄 백화점, 센 백화점, 월텟 등을 할 일 없이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우다가 결국 아무 것도 사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백화점 앞에서 가방 장사와 실랑이를 벌여 550밧 짜리 조그만 가방을 250밧에 샀고, 백화점에서 향수를 샀다. 그리고 개당 80밧 하는 책갈피를 일곱 개 해서 200밧에 떨이로 샀다. 어쩐지 더 싸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코헨의 협상의 법칙이란 책을 아직까지 안 사고 있던 것이 생각난다. 서울에 돌아가면 주문해야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월텟(World Trade Center) 앞. 방콕의 가장 번화가
 
몇몇 약국에 들러보았으나 놀랍게도 감기약을 팔지 않았다. 간신히 구한 것은 relief of nasal congestion이라는 용도의... 코감기용 약과 타이레놀 뿐이다. 타이레놀만 먹고 그 믿을 수 없는 감기약은 먹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기침 때문에 심하게 골이 울려 골치가 다 아팠는데 점심으로 차를 결들인 스파게티와 마늘 빵을 먹고 타이레놀 한 알 먹고 차가운 코코넛을 먹고 두어 시간 나무 그늘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으니 감기 기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새롭고 신선한 발견이다. 아마도 자율신경계의 내분비 대사를 억제하면서 두부 통증은 물론, 시상하부의 체온조절 제어부에 작용하여 비정상적인 체온과 기침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 같다. 아니, 단지 감기가 낫고 싶다는 희망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거리에서 말을 걸어오는 태국인들과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지포 라이터에 눈독을 들인다. 용기를 얻은 태국인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내 곁에 오고가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피차 영어 몇 마디 못하는 사정은 마찬가지라 크게 재밌는 얘기는 나누지 못했다.
 
불스는 백화점을 전전하면서 테니스 라켓과 토스터기 따위를 샀다. 난데없이 왜 여행중에 그런 걸 사는지 이해가 잘 안 가서 물어보니 저에게는 저만의 독특한 내면세계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더라.
 
불스를 만나 꿈에 그리던 seafood를 먹으러 가서 바닷가제를 시켰는데 기대 이하의 맛이어서 입맛을 다셨다. 이런걸 맛있다고 잘들 먹는게 희안했고 불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바닷가제에게 있어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매료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700밧이나 주고 먹었지만(지금까지 식비로 쓴 것중 가장 큰 돈) 이건 태국 물국수 보다도 맛이 떨어진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생선에 소금을 잔뜩 발라 석쇠에 굽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저런 걸 먹는 편이...
 
맥주나 한 잔 하려고 시얌 스퀘어까지 걸어갔지만 하드락 까페가 없어져서 잠시 멍해졌다. 술 파는 가게가 없어 코코넛 쥬스 한 잔 시켜놓고 담배도 피우지 못하는 가게에서 우두커니 있다가 나왔다. 어쨌거나 방콕의 이곳 저곳을 골고루 데려다 준 것으로 만족해야지. 다음에 불스가 이곳에 오면 익숙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 정도면 좋겠지. 저녁 늦게,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인파로 북적대는 카오산을 지나 선착장 부근의 술집으로 향했다. 강변 근처의 널찍한 레스토랑에서 남은 돈을 털어 맥주를 마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가 묵었던 방콕의 한 도미토리
 
아침에 일어나 중국인들의 축제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firecracker를 터뜨릴 때마다 시끄러운 폭발음과 연기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랏차담던 거리를 죽 행진하던 사람들은 거의 3000명 이상은 되어 보였다. 이지투어를 나올 때 가게에서 점원으로 있는 태국인 아가씨가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아이같은 목소리로 말해 나도 모르게 그만 으흐흐 웃고 말았다. 귀여운 아가씨다. 나는 다시 여기로 돌아올꺼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는 너도 한국어를 잘 하게 되겠지. 라고도 중얼거렸다. 흥청망청 돈을 쓰긴 했지만 즐거운 여행이었어. 라고도 중얼거렸다.
 
불스가 산 테니스 라켓을 내내 들고 다니다가 귀국했다. 집 근처에서 500원 짜리 소주를 마시고 간단히 맥주를 한 잔 한 후 내 얼굴을 기억하는 바의 아저씨와 몇 마디 나누다가 헤어졌다. 불스가 말했다. 다시 갈 겁니다. 이 여행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보람을 느꼈다. 여행은 질좋은 추억을 만들어 준다. 추억이 지닌 그 수많은 얼터레이션이나 자작 사기극이 아닌 눈부신 경험으로 충만한. 내 팔목에는 지금 야자 열매로 만든 팔찌가 걸려 있다. 흠. 하지만 그에게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진짜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2001/10/23, luke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1일, 아침에 샤워를 하고 첵아웃 한 후 버스 터미널에서 K. Kansar행 로컬 버스에 올랐다. 로컬버스는 어디가나 똑 같은 듯. 지겹게들 타고 지겹게들 내렸다. 그래서 정상 운행시간보다 1~2시간 정도 늦어지는 것은 예사인듯 하다.
 
말레이지아 정부의 노력이 어디를 가나 여실히 느껴진다. 잘 만들어진 도로망, 값싼 버스비,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도로망과 전력선과 수도가 잘 갖추어진 것 같다. 아니, 내가 말레이지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후진국이라는 선입견이 잘못된 것이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쿠알라 캉사르로 가는 길에 본 말레이지아의 가옥. 정글은 그들의 뒤뜰이었다. 타이핑에서 이포에 이르는 길은 말레이지아의 전통 가옥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다.


캉사르에 내리자마자 double lion 호텔을 잡고 그렇게 아름답다는 Ubudiah Mosque를 찾아 길을 나섰다. 시내가 작아 길을 찾는 것은 쉬운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레이지아 최초로 심어졌다는 고무나무를 찾지 못해 여러번 뺑뺑이를 돌았다. 최초로 심어진 고무나무 이후, 말레이지아는 주요 생고무 수출국이 되었다. 그것보다는 값싼 반도체 칩의 주요 생산지로 말레이지아가 낯설지 않았다.
 
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공원에 들렀는데, 썰렁하기 그지 없다. 공원은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말레이 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인도인들이나 강이 만나는 곳을 신성시하여 무슨 공원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을 자주 하는 듯. 그러고 보면 한국도 마찬가지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부 고관 대작 마누라들의 놀이터. 이런게 왜 중요한 관광 포인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강이 만나는 지점. 한 쪽은 맑은 물. 한 쪽은 흙탕물. 그래서 성스러워 하는 듯.

 
태양이 한참 뜨거울 무렵에 한 시간 쯤 뙤약볕 아래를 걸었다. 가는 길 저 멀리 황금빛 모스크가 보인다. 기실 카메론 하이랜드에서 보냈던 엽서 중 몇 장은 저 모스크가 찍혀 있었다. 엽서의 그림은 대단히 아름다웠으나 직접 보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탓이다. 그나저나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들어갈 수 없다고 손을 가로젓는다. 복장이 문제냐니까 아니라고 한다. 그럼 관람 시간이 정해져 있냐고 하니 그것도 아니란다. 외국인은 안되는건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 그냥 안된다. 문지기가 뭔가 말레이어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무슨 뜻은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복장, 외국인, 시간, 그런 문제는 아닌 건 대충 알겠는데 이 아저씨야, 난 한 시간을 뙤약볕을 참아가며(고행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쉽게 문전박대할 수 있는거냐? 어쨌든 뭐라고 얘길하든 영어를 알아듣질 못하니 그냥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Ubudiah Mosque. 1917년 이드리스 무르시둘 아드잠 샤아 1세가 지었다. 말레이지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손꼽한다. 아름답긴 아름답다. 내가 더위를 먹어서 그렇지.


다시 자외선을 듬뿍 함유한, 뜨겁다 못해 칼날 처럼 살갗을 도려내는 듯한 뙤약볕 아래를 걸을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해서, 궁리 하다가 관리인 안 보는 새에 모스크의 뒤로 돌아가 슬쩍 들어갔다.
 
예절상 신발은 벗었다. 그리고 모스크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타부를 타파하기 위해 회랑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아뿔싸, 240장쯤 들어갈 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디지털 카메라는 193장 째에서 사진을 더 이상 찍을 수 없었다.
 
원형으로 모스크 안쪽을 빙 두른, 이쪽 복도와 저쪽 복도 사이에서 사람들이 대화하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층으로 재빨리 기어 올라갔다. 193장 이상 찍을 수 없다... 계산을 잘못했다. 사진당 차지하는 메모리 용량이 각기 틀리기 때문에 복잡한 사진을 찍으면 용량을 더 차지해서 실제로는 240장이 아닌 200여장의 사진을 담을 수 있는 것 같다. 쓸모없는 사진을 찾아 일일이 지울 시간도 없고, 전지도 거의 떨어진 상태라 할 수 없이 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정말 억울했다. 예배당 안쪽과 펼쳐진 채 독서대에 얹혀 있는 커다랗고 낡은 코란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브디아 모스크의 내부 회랑. 과연 이 내부를 찍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닥은 티끌 하나 없이 정말 광 나게 닦아놨다. 왼쪽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 보이는 칠판에는 예배 일정이 적혀 있다. 드러누워 한 잠 자고 싶은 곳이다.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가시자 살금살금 기어 내려와 쪽문을 통해 모스크를 빠져 나왔다. 타이핑에서 태평스럽게 노닥거리다가 카메라의 전지를 충전해 놓지 않은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전지 용량이라도 남아 있으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불필요한 사진을 삭제할 수 있었을텐데...
 
다음은 박물관과 왕궁을 구경할 차례다. 터덜터덜 걸어갔다. 길은 이것 하나 뿐이고,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미치게 덥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턱 밑으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도저히 안 되겠기에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 쉬었다. 잎사귀 하나 없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햇빛은 사정 없이 내리 꽂히고, 사위는 정적만이 감돌았으며 인적이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아스팔트는 이글이글 달아올라 있었다. 근처에는 음료수를 사먹을 가게조차 하나 보이지 않는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20분쯤을 폭염의 정적 속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멍청히 앉아 있었다. 대책이 없다.  

마침 학교에서 파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이 지나가길래 손을 흔들며 다가가 뭣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쏜살같이들 도망갔다. 사실은 시내까지만 태워주면(아니 내가 몰고 널 뒤에 태워서) 맛있는 아이스 토푸를 사주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시내까지 돌아갈 생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안난다.
 
시내 쪽으로 향하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았으나 온통 챠도르를 뒤집어쓴 아줌마들이다.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그들도 달아났다. 불끈 욕이 튀어 나왔다. 외갓남자 좀 태운다고 차가 폭발하나? 차도르 벗지 않으면 말레이지아 경제발전은 어림없다! 망할 말레이 놈들아, 너네들 정말 재미없게 산다! 예쁜 여자도 없지? 차도르 벗겨봤자 뭐하겠냐? 원래 못생겼을텐데!
 
더위 먹었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어떤 아저씨가 타고 가는 오토바이에 히치하이킹 할 수 있었다. 정말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다. 그는 원래 시내에 들어갈 생각이 아니었는데 나를 시내까지 데려다 주었다. 뭔가 사례를 하고 싶어 붙잡았지만 극구 사양하고 손 한번 맞잡았을 뿐이다. 그는 미소와 함께 떠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부 청사 건물. 잘못 찍은 사진.


숙소에 돌아와 샤워하는 중에 나에게 이곳을 추천해준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은 오토바이가 있으니까 유유자적 이곳을 관광할 수 있었지만 나는 택시를 대절해서 왔다갔다 할만한 곳이다. 망할 놈. 그러면 그렇다고 말해줄 것이지.
 
시내에 돌아와 튀김과 소야 주스(아이스 토푸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맛은 같다)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먹는 것을 게을리하면 오히려 몸을 망치는 일이려니 하고 꾸역꾸역 먹었다. 튀김 모양은 각기 달랐지만, 튀김옷만 입혔다 뿐이지 내용물은 모두 같았다. 순 닭이었다. 이 빌어먹을 말레이지아 놈들은 맨날 닭고기만 먹고 살았다. 함께 사는 인도애들은 소를 안 먹지, 이슬람 애들은 돼지를 안 먹지, 그러니까 닭하고 생선만 죽어라고 먹어대는 것이다. 온 사방에 KFC가 있었고 모든 고기 요리는 닭 아니면 생선이다.
 
내 식사는 온통 닭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밀가루 국수건 쌀 국수건 닭이 들어가 있었다. 이들의 주식은 흰 쌀밥에 튀긴 닭고기를 얹던가, 안 튀긴 닭고기를 얹고 거기에 소스를 살짝 뿌린 것이었다. 국수 국물은 천편일률적으로 닭국물이었다. 똥을 싸도 닭똥만 쌀 놈들이다. 게다가 그 맛있는 닭똥집은 안 먹는 것 같다.   

닭 먹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잠이 들었다. 오후 내내 살만 죽어라고 태우고 고생만 했다. 깨어보니 2시간쯤 지났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약간 두통끼가 있다. 더위 먹고 닭 먹어서 그런 것 같다.
 
캉사르를 둘러보기 위해 나가 보았으나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시내의 길이는 고작해야 400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두세시간쯤 소설 보며 개기다가 식사하러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녔으나 고작 7:30pm 밖에 안 되었는데 먹을만한 곳들은 이미 문을 닫았다. 식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그저 황당할 뿐이다. fajar(광장이란 뜻) 뒷 편의 아마도 하나뿐인 food court에서 국수 한 그릇 먹었다. 콜라 값 계산이 잘못된 듯. 무시. 호텔로 돌아오니 인도인들이 바글거린다. 객실은 하나 밖에 안 잡아놓고 사람은 여섯명이 들어차 있다. 하하 역시 인도놈들은 어디가나... 하고 웃음이 나왔다. 새벽 한 시까지 소설 읽다가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싸고 첵아웃하고 디포짓 받으려 했는데 10rm밖에 안 돌려준다. 어제 60rm을 건네주고 돌려받은 것이 20rm, 그러니까 deposit을 20rm 줘야 하는데... 뭐라 했지만 증거가 없다. 내가 돈을 건네줄 때 50rm을 줬어야 하는데 60rm을 건네준 것을 받았고, 난 디포짓이 원래 20rm인 줄 알고 있었다. 환장하겠군.
 
무작정 시비 걸며 시간 보내기도 뭣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KL행 표는 구할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ipoh에 가서 ipoh에서 KL로 가야할 것 같다. 로컬 버스를 타고 이포로 향했다. 힌두사원이 있는 석굴과 불교 사찰이 있는 석굴이 볼만하다고 CH에서 귀뜸해 주었지만 캉사르에서 하도 데어서 들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포에서 장거리 버스 터미널을 찾아 KL행 버스를 찾아 보았다. 터미널에서 표를 파는 시스템이 한 창구에서 한 목적지를 파는 형태가 아니라 여러 버스 회사가 제각각 창구를 통해 같은 목적지의 표를 팔고 있기 때문에 창구를 제대로 찾아야 썩은 버스 안 타고 좀 나은 버스를 탈 수 있는데 VIP 버스는 한 시간 후에야 있고, 기다리고 예약하는 것은 질색이라 눈에 띄는 KL행 버스 아무 것에나 올랐다.   

역시 썩은 차다. 로컬 버스만 계속 타서 지긋지긋한데 모처럼 타는 익스프레스 버스도 이처럼 똥차니 불운의 별은 아무나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출발한다. 버스에 손님이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런데도 KL까지 잘 간다. 운전수는 거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운전수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영어를 잘 못해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어디에서 내려줄꺼냐고 지도를 보여주며 이곳 저곳 짚어 보이니 푸드라야 터미널이란다. 가이드북은 못 미더운 형편인데 아는 데라고는 푸드라야 터미널 밖에 없는 내 입장에서는 한 시름 놓았다.   

터미널에 도착. 이번에는 트래블러스 문 롯지를 제대로 찾아 10링깃에 도미토리에 투숙. 주인이 한국인이 있다며 나를 그 곳에 넣어줬다. 일본인 둘, 한국인 하나가 묵고 있다고 한다. 왜 동양인끼리 한군데 몰아 넣어 주려고 난리인지 원. 가뜩이나 한국인 안 만났으면 좋겠다 싶은데. 한국인 만나면 또 술을 마실 것이 뻔했다. 그것은 과다 경비 지출로 이어지고... 사실 경비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기념품을 산다던가, 택시를 탄다던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서울 이었다면 한잔 걸치고 택시비 아까운 줄 모르고 1- 2만원씩 내고 탔을텐데 여행만 하면 구두쇠가 되는게 신기하다. 아니다. 검소해지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sjid Jamek모스크. 잘 못 찍은 사진. 한밤중에 보면 환상적이다.

간단히 샤워하고 지도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KL 시내 지도]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습기 때문에 금새 땀으로 티셔츠가 축축해진다. 강변을 걷다가 마침 지하철 역이 보여 별 생각없이 타 봤다. 맨 앞칸의 앞 좌석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터널 전경이 보인다. 애 하고 둘이서 신기하게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페트로나스 빌딩까지 갔다. 한국 건설업체가 저런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잘 지어놨다. 올라가고 싶었지만 입장권을 사야 되는 것 같아서 관뒀다. 지도를 보면서 시내를 주욱 걸어 말레이지아 관광 안내소에 들렀으나 타이핑과 팜플렛이 거의 똑같아서 별달리 더 구할만한 것이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etronas Twin Tower. Petronas는 석유를 의미.


 부킷 빈탕 거리를 이리저리 방황했다. 말레이지아 최대의, KL 최대의 쇼핑가라지만 쇼핑에 관심이 없어서 그저 빌딩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이나 쐬고 나오는 정도였다. Lot 10 앞에 있다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까페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다지 email 보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컴퓨터 만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관두기로 했다.
 
빈탕 거리 옆길에는 많은 식당이 있었다. 거기서 맛있는 새우 국수를 먹고 숙소까지 걸어갔다. KL 중심 시가를 반이나 돌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4시간이었다. 말레이지아 최대의 도시가 하루 관광 코스라면 나머지 도시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만 같다. 아니면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기형적으로 성장한 도시의 전형들을 보아온 탓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의 도시 때문에 내가 도시를 싫어하게 된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enara Kuala Lumpur (KL Tower) 텔레콤 타워로도 불리우며, 말레이 지폐에도 등장. 말레이 지폐는 액수만 다를 뿐, 다 똑같이 생겼다.


공동 샤워장에서 샤워하고 도미토리 침상으로 돌아와 보니 한국인 여자가 옆 침대에 있어서 아는 척을 했다. 싱가폴에서 살고 있는데 태국으로 올라가는 길이란다. 말레이지아는 나잇 라이프가 없어서 심심하단다. 내게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할 수 있는 고산족 트래킹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아는 대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내 생각엔 태국 북부 산악지대 트래킹은 말레이지아 정글 트래킹에 쨉이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외국인과 함께 나갈 준비를 했다. 날더러 같이 나가잘까봐 슬쩍 게스트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생각에 잠겨 한참 걷다보니 길을 잃었다. 길 잃는 것에 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7 일레븐에서 맥주를 샀지만 먹을만한 곳이 없어 식당 같은 곳으로 들어가 닭 튀김을 하나 주문하고 먹었다. 종업원이 술은 안된다고 뭐라고 그러길래 식당을 살펴보니 인디언 레스토랑이었다. 채소만 먹고 사는 사람들 상대로 하는 가게에서 왜 닭을 팔지? 술 마신다고 뭐라고 지랄했지만 무시하고 게눈 감추듯 맥주를 숨기고 홀짝 홀짝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을까. 

숙소에 돌아와보니 인사성 바른 일본인이 옆자리에서 TIC에서 잔뜩 가져온 팜플렛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행자들과 대화를 잘 안 나누는데,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일본애 셋과 얘기했다.   

한국인 여자애는 옥상에서 닭 같이 생긴 외국애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말 닭같이 생겼다. 말투도 어눌하고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녀석 같아 보인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담배 한대 피우고 그냥 도미토리로 돌아와 일본애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 여자가 내려와 같은 한국인끼리 얘기하지 않아서인지 섭섭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어도 잘하고 외국 생활도 오래했기 때문에 외국인과 잘 어울리니까 그녀가 섭섭해 할 이유는 없다고 봤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녀의 티셔츠에 적힌 어떤 말 때문에 서양애들이 그녀를 무슨 젓소처럼 쳐다보는 것이 꽤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문귀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왠간한 남자들이라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만한 말이다.   

밍기적 거리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보니 아홉 시, 몇몇 사람들이 일어나 책을 읽고 있다. 얼굴을 보니 머리털이 엉망진창. 샤워하고 돌아왔다. 한국 여자애는 밥 먹으러 나갔다. 나가서 미 훈을 시켜 먹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마음에 든다.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된다.   

짐을 챙기러 숙소로 돌아왔다가 어떤 서양인이 굉장히 친근한 척 하며 말을 걸어왔다. 하, 재밌는 친구인데? 멜라카행 버스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꺼라고 충고한다. 난 예약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첵 아웃하고 푸드라야 터미널에 가보니 멜라카행은 3:30pm이 가장 빠른 차. 난감해서 한 시간쯤 카운터 사이를 헤멨다. KL과 멜라카 사이는 기껏해야 150-200킬로미터 밖에 안된다. 또한 멜라카는 말레이지아 최고의 역사유적지이자 관광지니까 버스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숙소 나오면서 저런 논리로 큰 소리 뻥뻥 쳤는데 버스를 못 잡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참 돌아다녔다. 결국 12:30 차를 잡을 수 있었다. 빙고. 잘하는 짓인지 의심스러운데, 멜라카에서 3일 정도 개겨야 할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uduraya Bus & Taxi Station 정말 사람 많고 복잡하다.


버스 타고 가는 동안 줄곳 팔, 다리가 가려웠다. 멜라카에 도착해서 보니 한쪽 팔과 한쪽 다리에 점점이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땀 때문에 피부가 가려워서 그러려니 무시하고 숙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지도가 워낙 형편없고 설명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레이지아 어디를 돌아다니든 내리면 낯설고 생소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했다. 덕택에 입에 거미줄이 안 생기고, 외롭고 고독해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숙소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더위 뿐이라면 견디겠는데 이놈에 습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쉽게 지친다. 

땀에 절어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본인 둘이 있었다. 그들 숙소가 마침 거기란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박박 머리를 민 주인이 나와 인사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이 없단다. 도미토리를 둘러 보았다. 희안하게도 침대마다 칸막이를 쳐 놓았다. 나쁘지 않아 보여 묵겠노라고 말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숙소로 가는 길.


사워를 했다. 정강이에서 허리선을 따라 팔뚝까지 이르는 긴 붉은 반점의 열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AIDS 같아 보여 더럭 소름이 끼쳤다. 알몸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가려운 반점들이 있었다. 때마침 공동 샤워실을 나오는, 팬티만 입은 내 모습을 본 주인장이 울퉁불퉁 부어오른 내 피부를 보더니 벼룩 때문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내게 어디서 묵었냐고 물었다. 트래블러스 롯지라니까 그럴 줄 알았다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KL의 거의 모든 싸구려 숙소들마다 벼룩이 있고 그들의 본부가 트래블러스 롯지란다.
 
그는 내 배낭과 소지품을 모두 들고 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배낭을 들고 숙소 안쪽의 정원에서 짐을 모두 꺼내 햇빛 아래 늘어놓았다. 때마침 먹구름이 몰려와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정원에는 영국인 할멈이 앉아 오렌지 쥬스를 홀짝이며 (난 그때까지 팬티만 입고 돌아댕기고 있었다) 내 몸에 돋아난 발진을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꼬치꼬치 이것저것 캐 물었다.
 
주인이 Tiger balm을 가져다 줘서 그걸 환부에 발랐다. 안티 프라민 연고와 비슷하다. 얼마나 지속될지 걱정이다. 일본인 여자애 둘에게 발진을 보여주며 그들을 놀래켰다. 나도 참 할 짓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랑이 약


영국 할멈이 수다를 멈추고 신문을 챙겨 산책하러 간 사이에 주인장이 조용조용 말해 주었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 치고는 꽤 다정하고 친절한 양반이다. 도미토리에서 묵을 때 귀중품은 자기에게 맡기던가 따로 챙겨서 복대에 넣어두라고 한다. 왜 그러냐고 하니, 어젯밤에 도미토리에서 묵던 프랑스인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숙소의 주인은 도난에 책임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인은 돈을 잃고 기분이 나빠진 나머지 숙소를 나갔다고 말했다. 이틀 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내가 묵기로 한 침대 건너편에 어떤 작자가 들어온 후부터 그런 도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발진 때문에 가려워서 계속 바르다보니 호랑이 약을 거의 다 썼다. 침대에 앉아 한 시간 내내 약만 바르고 있자니 웃기고 처량했다. 마침 지나가던 주인장의 아내가 주인장하고 똑같은 말을 했다. 옆 침대의 여행자가 도둑 같다는 것이다. 

약 다 바르고 나니 저녁이 다 되었다. 바깥으로 나와 일단 호랑이 약을 구해보기로 했다. 이리저리 거리를 헤메다가 조그만 수퍼에서 연고를 두 개 사고 저녁을 먹으러 돌아다녔다. 가랑비가 스멀스멀 내리고 있었다. 주문을 받은 가게 주인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어 수프와 국수를 따로 내왔다. 양이 상당했지만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아(4링깃) 둘 다 먹었다. 배가 한 아름 튀어 나왔다.

동네가 참 조용해서 마음에 든다. 관광지까지는 거리가 좀 되지만 숙소도 훌륭하고 식당도 훌륭하다. 오는 길에 식당에 들러 맥주를 한 잔 했다. 그 지역의 나이든 사람들만 찾는 곳인지 젊은 놈이 들어가 혼자 담배 피우면서 맥주를 홀짝이니까 경계심을 갖고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어쩌면 팔뚝에 돋아난 반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봐도 무시무시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녁 때면 맥주 마시러 가곤 하던 동네 술집 대낮에는 음식점이다.


숙소에 돌아와서 주인장에게 병원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준 약이 효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판단했는지 벼룩 물린 것 가지고 병원에 갈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렸다. 그렇지가 않았다. 호랑이 약을 바른 후 한두 시간은 가려움증이 사라졌지만 그 후에 다시 발라줘야 했다. 이 상태로는 여행이 어려울 것이다. 주인 말로는 발진이 보통 일주일은 간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일을 당한 여행자들은 보통 숙소에 짱박혀 쉬면서 발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겠노라고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옆 침대의 도둑놈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쯤 들어오냐니까 밤 늦은 시각에 들어온단다. 

pda를 꺼내 소설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팔, 다리가 가려워서 깨어나 다시 약을 발랐다. 그러면서 내일은 병원에 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벼룩에게 물렸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치료해야 겠다고 마음먹은 일, 그리고 내게 별로 시간이 없다는 것. 정보들이 나를 괴롭혔다. Reality from information, from an accumulation of knowledge.   

새벽 한 시쯤 지나 주인이 현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는 깨끗하고 마음에 들지만 숙소를 들락거릴 때마다 일일이 주인이 문을 열어 줘야 한다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여겨졌다. 들어온 친구는 옆 침대에 묵고 있는 그 도둑놈이었다. 주인과 도둑놈 은 하다못해 인삿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방의 불이 모두 꺼져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수 없었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었다. 비몽사몽, 발진이 가렵기도 하고 어디서 벼룩이 기어다니는 것 같아 영 찜찜하다. 그때 옆 침대에서 드르렁 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난 그가 도둑이라는 주인장의 심증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든 조그만 보조가방을 열어놓은 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녀석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살금살금 걷는 소리.   

지척에 있는지 그 친구의 땀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돌아와서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로 향했다. 내 침대로 가까이 다가 왔길래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멎어 내 동태를 살피는 것 같다. 나는 인기척을 내며 침대에서 몸을 굴렀다. 용수철이 찌릉찌릉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내가 충분히 잠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침대로 살금살금 기어가 소리를 죽여 침대에 기어 올랐다. 침대가 오래되어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저 녀석이 정말 도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 불편하고, 또, 기분이 나빠졌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가방에 손을 뻗을 때 덥석 잡고 빽 소리를 질렀더라면 훨씬 편해졌을텐데. 벌레에 물려 그렇잖아도 기분 더럽던 참에 주먹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다가 장난끼가 들어 침대에서 살그머니 일어섰다. 그리고 발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그의 침대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그의 침대를 쳐다보니 배개를 비딱하게 벤 그 녀석의 얼굴이 어슴프레하게 보였다.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 것 같다. 내 침대로 돌아오면서 미친 놈처럼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웃었다.   

그리고 연고를 좀 더 바른 후 바로 곯아 떨어졌다. 피곤한 탓이다.   

아침에 깨어보니 옆 침대가 비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가 아침 일찍 나가더란다. 내게 뭐 잃어버린 것이 없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 배낭은 어제 오후부터 정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옷가지들은 모두 세탁기 속에 넣어 두었다. 자질구레한 짐들이 탁자에 엉망진창으로 놓여 있어 그중 하나를 살며시 슬쩍 해가도 모를 형편이다. 항공권도, 여권도, 크레딧 카드도, 현금도 모두 그 무더기 앞의 작은 바구니에 놓여 있었다. 얼마나 나는 부주의했던가? 그에게 전날 밤 일어난 웃기는 일을 설명할까 하다가 관두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약을 바르러 정원에 나가보니 일본인 남자들이 떼거지로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군이나 기숙사 단체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탁자에 이 열로 마주보고 앉아 조용히 똑같은 식사를 하는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더치 레이디, 이 맛있는 우유를 먹고 토스트 한 조각 먹어 두었다. 냉장고 속에서 뭔가 꺼내먹는 것은 자유로웠다. 그 옆에 장부 겉장에는 당신의 양심을 믿는다고 적혀 있었다. 나도 내 양심이 있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에 내 이름이 적힌 칸에 우유 하나 먹었다고 적어 놓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양심도 있고 pda도 있었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를 잃었고 재산은 없었다. 재산은 원래 없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여자애는 얼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언제 만나서 뭘 했는지도 기억 안 난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다지만 정말 한심한 지경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망각의 기술을 제대로 터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그 애 때문에 한 동안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본래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마치 중요했던 것처럼 떠들어대는 위선적인 태도는 버리고, 지금은 배낭 무게 보다 백 배는 무거웠던 짐들을 하나 하나 버리고 느긋하고 편안하게 쉬러 여행을 온 것이다. 잊어버리자.   

간단히 옷가지를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다. 어제 버스 내릴 때 지나쳐왔던 풍광들이 이 도시의 중심부인 듯. 맬라카의 지도를 참고하여 코스를 정하고 하나 하나 밟아 나갔다. 돈이 별로 없어 먼저 은행을 찾아봐야 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거리에서 과일 파는 아저씨에게 한참을 물어봤지만 visa 카드로 현금 인출이 가능한 은행은 고사하고 내 손엔 어느새 과일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내게 과일봉지를 내밀고 4링깃 달라고 불쑥 말한다. 그걸 먹으면서 땡볕 아래를 걸으니 십분도 안되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물어물어 찾아가 본 병원은 마침 일요일이라고 문을 열지 않았다.   

스태듀이스 인지 하는 특이한 식민지 양식의 건물 앞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을 때 Trishaw가 다가와서 날더러 관광 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나는 내 몸에 돋아난 끔찍한 발진들을 보여주고 관광보다 병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와 협상했다. 문을 연 병원을 찾을 때까지 태우기로 한다는 조건으로 15링깃 지불. 협상을 마무리하고 그의 트라이쇼에 올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뒤에 보이는 것은 Christ Church of Melaka. 1753년 독일인들이 지었다. 앞의 시계탑 옆 건물이 그 유명한(?) Stadthuys로 1641년 더치가 지었다. 이 동네에서 빨간색 건물은 무조건 더치가 지은 것 같다.

트라이쇼는 달렸다. 나는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애처럽게 페달을 밟는 모습을 옆 자리에서 지켜 보았다. 바짝 마른 젊은 친구다. 그가 내 얼굴에 돋아난 땀과 몸에 난 발진에 기겁을 하면서 혹시 춥지 않냐고 물었다. 춥냐고? 이 친구는 내가 말라리아에 걸린 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발진을 보고 모기에 물린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하하 웃으면서 말라리아는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나도 말라리아 증세 쯤은 알고 있었다. 말라리아 걸리면 말라리아 걸렸다는 것을 알만큼은 된다.  

그에게 수입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자기는 돈 벌어서 태국에 가끔 놀러간다고 말한다. 결혼 했냐고 물으니 결혼 안 했단다. 나도 안 했다고 말하고 나는 그래서 자유인이라고 말했다. 녀석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씨익 웃으며 자기도 자유인이라고 말한다. 자식, 태국에 놀러가는 이유야 뻔한 것이다. 말레이지아에서는 저녁이면 가게들이 문을 닫으니까 욕구충천한 젊은 녀석들 술도 못 마시고 여자도 사귀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태국 가면 2000 밧에 15살 짜리 소녀를 살 수 있다니, 나는 그에게 다 안다는 듯한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녀석도 징그럽게 웃었다. 자유인이라... 젊은 남자에겐 참 징그런 개념이군.   

사전 정보가 있었는지, 아니면 운이 좋은 것인지 첫번 째 들른 병원의 문이 열려 있다. 왠지 15링깃이 아깝게 느껴졌다. Lingham Medical Centre. 그는 굳이 나를 따라오며 가는 길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한다. 병원 카운터에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앉아 접수를 받고 있었다. 외국인이 병원을 찾는 것이 처음인지 빤히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는다. 접수증을 끊어 늙수레한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안내해 주며 문께 기대고 선 채 말똥말똥 쳐다 보았다. 인도인과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피가 섞인 소녀들은 귀여워 보였다. 이러다가 내가 로리콘이 되는 건 아닌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병원 진료 카드.

내 얼굴과 몸에 돋아난 발진을 본 의사가 대뜸 하는 소리가 나와 같이 온 트라이쇼 청년과 같은 애기였다. 춥지 않냐? 땀은 왜 그렇게 뻘뻘 흘리는가? 모기에 물린 자국이 아닌가? 나는 말라리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드디어 청진기 몇 번 대보더니 대뜸 food poisoning(식중독) 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도 발진을 보고 처음 생각했던 것이 식중독이었다. 그는 내가 지난 2-3일간 먹었던 음식들을 꼬치꼬치 캐 물었다. 해산물 먹었냐? 물론 먹었다. 그럼 식중독이 맞다. 내가 말했다. 아니다. 이건 식중독이 아니다. 의사가 의아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의사가 말했으면 들어야지 왠 잔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식중독의 증세를 일일이 나열하며 열이 있다거나 현기증을 느낀 적이 있냐고 물었다. 이 뙤약볕에 열이 안난다면 이상한 거고 뙤약볕 아래서 거리를 한 20분 걸으면 현깃증 나는 거야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도무지 말을 안 들어서, 배를 걷어 보이고 여기에는 발진이 없다. 이게 만일 식중독이라면 온 몸에 발진이 낫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세상에, 나는 지금 의사와 내 증세에 관해 왈가왈부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 있던 우람한 간호사가 낄낄 웃더니 내 편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내가 이겼다.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는 심지어 벌레 물린 데 먹는 약 종류 까지 알고 있었다. 안티 알러지와 안티 히스타민 아니면 안티 바이오틱류? 그래서 나는 부작용이나 위장 장애를 느낀 적이 없다고 미리 말씀드렸다.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프람 코리아, 유 노우 댓 푸어 컨추리? 고개를 가로 저으며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엔지니어 라고 대꾸했다.   

간호사, 카운터 보는 아가씨, 그리고 한 80은 먹은 것 같은 의사, 이렇게 세 명이 이 조그만 '의원'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카운터의 아가씨 까지 외국인 진료를 견학하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의사가 엉덩이를 걷으라고 말했다. 아... 주사는 뭐... 안 맞으면 안되나? 의사가 맞아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간호사와 젊은 아가씨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낄낄 웃으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의사가 주사를 놓기 전에 긴장을 푼답시고 말하길, 벼룩은 숫놈과 암놈이 있는데(그건 나도 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암놈이 항상 더 위험하다고 말하며 주삿바늘을 엉덩이 깊숙이 찔러넣고 가차없이 피스톤을 눌렀다. 나도 의사 선생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암컷은 항상 위험하다. 주삿바늘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빠졌다. 잠시 오른쪽 엉덩이가 뻣뻣해서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   

타블렛(알약) 몇알을 받아 챙기고 낄낄 웃는 간호사와 카운터 아가씨를 뒤로 한 채 계산을 끝냈다. 거의 40링깃 가까운 돈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트라이쇼 운전사의 어깨를 빌어 절뚝절뚝 병원을 빠져 나왔다.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은 스태듀이스로 돌아가는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태국 아가씨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다는 말을 늘어 놓았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이제는 괜찮다고도 말하고 껴안았다.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음료수 하나 마시고 알약 몇 알을 입에 삼키고 잠시 쉬다가 관광을 시작했다. 파모사를 거쳐 언덕 위에 있는 성 파울스 교회에 올라가니 해안이 보인다. 폐허가 된 건물은 한창 복구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그 안에는 한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루중 가장 더운 때 였으므로 관광객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대뜸 내 국적을 묻더니 KBS인지 SBS인지 한국의 방송국이 자기를 며칠 전에 두번 째로 찍어갔다는 말을 무덤덤하게 늘어 놓았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 딱히 인상적인 것이 없었고 방송을 거의 십년 넘게 안 보았기 때문에 뭘 찍어갔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담배 피우면서 그가 작업하는 모양새를 구경하고 말이나 몇 마디 나누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Famosa. 1511년 포르투갈이 지은 것. Famosa란 fortress를 말하는 것으로 훗날 더치들이 침략하여 성곽을 박살냈다. 1641년 복원됨.

그에게 담배나 한 대 주고 잠시 쉬다가 언덕을 넘어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에서 이런 저런 멜라카의 역사를 대충이나마 공부했다. 멜라카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인 식민지 도시였다. 지정학적인 위치 탓에 유럽의 침탈이 잦았고 포르투갈 교회와 독일식으로 지어진 기독교 교회와 스페인식 성곽과 중국식 건물과 말레이 전통 가옥과 현대적인 건물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하루 관광 코스였다. 습기 탓에 끈적거리고 땀이 많이 나서 걸어다니기는 불편하고, 자전거를 빌리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이꼴로는 돌아다니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가려워서 두 시간에 한 번씩 병원에서 준 연고를 발라야 할 지경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독일 건물. Stadthuys.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물관 내부의 정원. 매우 인상적으로 썩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물관에 걸려있는 역사화. 거짓말쟁이는 물에 던져 넣었을 때 살아날 수 없지만, 진실을 말하는 자는 아무리 오래 물 속에 있어도 살아난다고 적혀 있다. 난 45초 정도는 진실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간음하다 걸린 사람은 마을 광장에 붙들어 매놓고 태형으로 다스린다. 옆 사진과 더불어 괜히 찍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의미한 사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

Hang Li Po의 벽이라 불리우는 것. 대단히 잘 찍은 사진. 1459년에 멜라카의 술탄과 결혼한 중국 공주의 집이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와서 소원을 빈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 겠기에 pda를 뒤적여 광장 한복판에 놓여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마코타 퍼레이드. 가다보니 서라벌 식당인지 뭔지 하는 한국 간판이 눈에 띄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한국 음식 먹는다는 것이 우스워 지나쳤다. 멜라카는 작은 도시고, 관광청에서 얻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별달리 얻을 정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게스트 하우스 주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백화점에서 부페식 식사를 했다. 먼저 조리사에게 손가락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가르키면 그것을 접시에 담아준다. 다 끝나면 금액을 알려 주고 근처 카운터에 가서 돈을 지불한다. 필요하다면 음료수를 사고, 돈을 카운터에 냈다는 영수증을 들고 음식점에 내밀면, 음식을 담아놓은 접시를 내준다.   

아무래도 샤워라도 해야 겠기에 숙소로 돌아와보니 영국 할멈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 한 군데 짱박혀서 몇날 며칠이고 시간을 보내며 조용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스타일인 것 같다. 내게 시간이 좀 더 있다면 할멈처럼 느긋하게 지낼 수 있으련만. 너무 짧은 기간에 이곳 저곳 메뚜기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타이핑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오후 5시 무렵, 숙소를 나와 백화점에 잠시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고 천천히 언덕 꼭대기의 세인트 폴 교회로 올라갔다. 마침 일몰이 떨어지면서 선선한 해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몇몇 연인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 앉아 일몰을 즐기고 있다. 평화롭다.   

일몰이 끝났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다. 교회 계단 맡에 앉아 개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다만 생각을 계속했다. 내가 여자애에게 작별편지를 보낸 것이 잘한 일인가 하고. 그 덕에 그 아이에 관한 것들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아니 나는 작년 초에 이미 그 아이의 눈빛에서 막연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내가 느낀 거부감을 피하려고 애썼다. 무언가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있을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하지만 작년 말까지 그 아이와 가끔 만나거나 얘기하는 동안 다른 여자애들은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 관심있어 하던, 아니 나를 좋아한다던 여자애들을 둘이나 걷어찼다. 아니 여자애에게 관심이 없을 때는 흔해빠진 상투구 그대로, '미안하다. 난 애인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럼 내게 다시 말을 걸지 않아 편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여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어 본 적이 드물었고 또한 그것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그냥 making love만 죽어라고 했다.   

내 인생은 무언가에 orient되어 있었다. 제길. 한글 안쓴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단어가 생각 안 나는군. 그럼 어째서 그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내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내겐 정이 없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혼자였고 고독했지만 그것 때문에 불편해 한 적은 없었다. 혼자 있는 것을 즐겼다.   

일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 모두 이제 끝이 났다. 오히려 여자애보다 일 문제가 더 가슴아팠다.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더욱 우울해졌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해보고 싶었던 종류의 일이었다. 지능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 어린 시절에 내가 무엇이 되겠다고 결정할 때, 내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원하는 것을 실체화할 수 있는 강력한 매력과 중독성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프로페셔널이 되어 있었다. 세 명의 프로그래머가 의기투합해 만든 벤처는 이제 끝났다. 이 여행은 그것 때문에 생긴 상실감을 맑은 공기로 채우기 위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주인이 수 차례 바뀌었던 도시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땅거미가 깔릴 때까지 계단 밑으로 새까만 개미 떼가 한 줄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나는 '시간을 내서'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잘못했다는 따위를 생각했다. 그동안 여행 덕택에 바빴기 때문에 괴롭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제대로 냉정하게 직면했다. 그 아이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 내가 일이 잘 안되어서 괴로움을 느꼈던 것은 내가 투자에 관한 오판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다시 그런 종류의 일을 하게 되면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켜 크리티컬한 부분에서 엄밀한 냉정함을 유지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몇몇이 가슴 아프다거나 작살이 나더라도 품고 있는 생각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점.   

그나저나 거의 다 잊어버렸다. 과거사를 덮어두고 금방 잊어버린 채 히죽히죽 웃을 정도로 내가 냉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이다지도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작년에 원했던 바대로 나는 제대로 된, 아니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한동안은 그 상태를 지속할 것이다.
 
담뱃불을 개미열의 한가운데에 갖다 대니 혼란을 느낀 개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몇은 타 죽었다. 대열은 1분쯤 지나 원상복귀되었다. 다시 담뱃불을 떨구어 오래토록 놓아두자 대열은 거의 사라지고 주변이 혼란스러워졌다. 길을 잃은 개미들은 각자 자신들이 오던 반대편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언덕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선선하다. 한낮의 짜증나는 습한 더위가 무색해질 정도. 천천히 언덕을 넘어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낮에는 한적하고 비좁은 도로였던 곳에 장이 서고 가판이 벌어지고 휘황한 조명이 반짝였다. 담배를 물고 느적느적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맥주도 먹고 밥도 먹고 광장에서 벌어지는 쇼도 구경했다.   

돌아오는 길에 스태듀이즈 앞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의 어렴풋한 실루엣을 보았다. 낮에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던 비쩍 마른 트라이쇼 청년이다. 그는 발진은 많이 가라 앉았는지, 가렵지는 않은지 내 걱정을 해 주었다. 하하 웃으며 그를 껴안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빛과 소리의 향연' 쇼가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빛과 소리를 이용해 말레카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지난한 식민지 역사 임에도 불구하고 말레이 인들은 그것들을 묘한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박물관에서 본 바로는 식민 시대를 굳이 수탈의 역사라고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식민지 시대에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하고 원주민들이 서양문물과 큰 충돌없이 공존했던 탓에 수탈은 커녕 문화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건강한 마음을 일찌감치 가질 수 있게된 것인지도 모른다.
 
말레이지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애초에 말레이지아를 그냥 통과하는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와봐야 겠다. 나잇 라이프가 전무하다시피 해서 밤이 되면 심심해지지만, 그런 밤엔 기네스 맥주 한 캔 오두마니 앞에 놓고 책을 읽으면 되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 파울즈 교회 폐허에서 바라본 빛과 소리의 쇼가 벌어지는 광장

어제갔던 노인네들이 많은 가게에 다시 들러 뻔뻔한 이방인으로서 맥주 한 잔 하고 숙소로 돌아와보니 주인장이 늦은 시각에 컴퓨터 앞에 앉아 포르노 사이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가 마침 보고 있던 화면에는 korean girls가 나와 있었다. 작달만하고 호리호리한 이 주인장은 마누라 몰래 밤이면 전세계 각종 여성들의 사타구니 사이를 구경하는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어왔던 것 같다.
 
식당에 앉아 냉장고에서 찬 음료를 꺼내 마시고 pda를 꺼내 오랫만에 날짜를 체크해 보았다. 말레카가 마음에 들어 하루 더 머물 생각이다. 

아뿔싸. 날짜 계산을 잘못했다. 카메룬 하이랜드에서 KL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말레카로 온다는 일정으로 날짜에 여유가 있겠거니 했더니만, KL에서 암컷 벼룩들에게 봉사하며 하룻밤을 머무는 바람에 싱가폴에서 이틀쯤 보낸다는 계획이 틀어졌다. 내일 당장 떠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싱가폴에서 일박 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잠시 느긋하게 마음을 놓기라도 하면 이놈에 여행일정이 물 먹은 가죽끈으로 꽉꽉 조여오는 것 같다. 사방에 흩어진 짐 정리부터 해야 할 것이다.
 
옆 침대에 필리핀 아저씨가 짐을 풀어놓고 런닝과 팬티 바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에게 필리핀이 가볼만한 곳이냐고 묻는 것은 어쩐지 실례가 될 것 같아 생략했다. 나이를 꽤 먹었음에도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날더러 싱가폴까지 바로 가지 말고 조호바루에 내려 조호바루에서 싱가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 같은 것을 타면 경비가 절약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KL의 싼 숙소들을 알려주었다. 물론 벼룩 조심하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벼룩을 예방하려면 바닥과 침대 사이에 그놈들이 기어올라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면 안되는데, 벼룩이란 놈들은 매끈매끈한 비닐이나 금속은 잘 안 지나다니므로 배낭을 침대에 기대 놓을 때 밑바닥에 비닐을 깔면 될 것이라고 말해 줬다. 그야 물론 줏어들은 애기를 해 주었을 뿐, 실험해 본 적이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KL의 숙소에서 나처럼 배낭을 침대에 기대 두었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식당에서 필리핀 아저씨와 잡담을 늘어놓고 있을 때 지나가던 숙소 여주인에게 물어보니 내일 싱가폴로 가는 버스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말을 한다. 관광객들이 싱가폴로 돌아가면서 좌석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왠지 불안했지만 아침 일찍 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알아보기로 했다.   

게스트북을 뒤져보니 한국인들이 적어놓은 글귀들이 보인다. 숙소가 깨끗하고 마음에 든다는 애기였다. 대부분 홈스테이같은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나도 한 줄 적어 놓고 일찌감치 자러 갔다.   

아침 일찍 시내 버스를 타고 시외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리저리 카운터를 헤메며 알아보니 오후 2시쯤 버스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간만에 인도 음식으로 아침겸 점심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이 이층 방들의 모습을 구경시켜 주었다. 일층의 도미토리에서만 지내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훌륭한 방들이다. 이런 방이라면 여행의 피로가 완벽하게 가실 것 같다. 왠지 도미토리에서만 묵은 것이 억울하다.   

계산을 끝내고 다시 들르마 말하며 시외 버스 터미널로 출발. 시간이 좀 남아 내가 타야할 버스에 미리 짐을 구겨 넣고 군것질 꺼리로 인도 음식을 사고(인도 음식이 아니라 말레이에 적응한 인도 음식이다) 근처 컴퓨터 가게들 구경하다가 버스에 올랐다. 차가 출발할 때 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만 타면 조는 버릇은 인도 여행 때 생긴 것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국경이었다. 어젯밤 필리핀 아저씨의 충고는 좋은 정보였지만 시간이 별로 없고 싱가폴에 늦게 도착해서 숙소 찾아 헤메다니다가 시간 다 보낼 것 같아 싱가폴 행 버스표를 끊었다.   

출입국 절차는 간단했다. 여권, 출국증 내고, 여권, 입국증 내고 맞은편으로 가면 타고왔던 고속버스가 싱가폴 시내까지 승객을 태우려고 대기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싱가폴 출입국소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고양이.

싱가폴 시내로 들어가면서 뭔가 빼먹은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들어 그게 뭔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축 늘어졌다. 또, 깜빡 잊고 환전을 안 한 것이다.
 
싱가폴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버스가 도착한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버스 터미널에서 물어보니 라벤더 거리, 대체 라벤더 거리가 어디쯤 붙어있는 곳이란 말인가? 싱가폴 달러가 당장 없어서 하다못해 버스건 택시건 잡아탈 수가 없다. 급한 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atm이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봉고 운전수 아저씨에게 atm이나 은행이 어디있는지 물으니 그도 모른단다. 그럼 부기스 정션으로 가는 길은?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나 자신의 멍청함에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이런 또라이, 남은 링깃이라도 환전을 해 두었어야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정보란 것이, 카메룬 하이랜드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가 알려준 시즌즈 홈스테이가 로처 로드와 부기스 정션 부근에 있다는 것과 멜라카에서 묵었던 숙소에서 주인장이 적어준 시즌스 홈스테이 약도 달랑 한장 뿐이다. 그 약도에 라벤더 스트리트는 나와있지 않았다. 봉고 운전사 아저씨가 부기스 정션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배낭을 단단히 여미고 출발하려던 참에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자기가 거기까지 태워주겠다고 한다. 이런 고마울 데가. 일이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상관없다. 집에다 전화 한 통 하면 된다며 전화를 걸어 뭔가 말하더니 봉고에 오르라고 한다. 그는 말레이지아에서 싱가폴로 온 사람이었다. 내가 말레이지아 사람들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추켜 세우니 요즘은 그렇지도 않단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수많은 인도네시아 난민들이 인접국인 말레이지아로 들어오면서 그 가난한 사람들이 말레이지아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고 한다. 절도, 강도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말레이지아 인심도 이제 옛말이라는..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그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 동네에서는 사람들과 악수와 포옹을 참 자주했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환전을 해야 한다. 부기스 정션 부근의 래플즈 아케이드에서 atm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발견. 들어가보니 말레이 링깃을 싱가폴 달러로도 환전해 주고 있었다. 링깃과 달러를 꺼내 겨우 종이 몇 장에 불과한 싱가폴 달러를 받아쥐었다. 갑자기 긴장되었다. 내가 가진 돈은 다 합쳐서 125 싱가폴 달러, 숙소 잡고 내일 센토사 섬에 가고 식사 한 두끼 하면 그걸로 끝이다. 여차하면 수수료 엄청나게 비싼 크레딧 카드를 또 사용해야 한다. 싱가폴 물가수준은 한국보다 약간 비싼 편이었다.   

돈이 생기니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물어물어 지물인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찾고 리앙 샤 스트릿과 탄쿼란 스트릿을 찾았다. 길거리를 헤메느라 일곱시가 넘은 시각. 시즌즈 홈스테이를 발견하고 비좁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발견한 종이 쪽지는 방이 다 나가서 미안하다는 내용. 마침 계단 꼭대기에서 안경을 쓴 나이깨나 들어보이는 숙소 주인이 내려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거듭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지 방이 없다는 말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숙소 가는 길. 사인펜으로 표시한 것은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버스 정류장 표시. 래플즈 호텔 앞에 있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주인장이 불러 세웠다. 올라오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났다. 여기 주인장이 관상을 본다고 그랬던가? 방이 있었다. 이층 침대가 놓인 작은 방이다. 창문이 없다. 이렇다 저렇다 가릴 처지도 아니라 바로 첵인 하려고 카운터에 앉았다. 하루 묵는다니까 싱가폴 관광은 최소한 2박 3일은 해야 한다고 주인이 주장했다. 타월을 하나 빌렸다. 아... 타월 잊어먹은게 참 별스럽게 사람 귀찮게 만든다. 어찌된 일인지 여행갈 때마다 꼭 타월을 빼먹었다. 그에게 전화 좀 쓸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바깥으로 나와 거리를 거닐다가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엔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 icq로 만났던 싱가폴인인데 놀러가면 꼭 가서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날짜가 촉박해 오늘 저녁 아니면 만날 여유가 없을 것 같다. 그가 날더러 오처드 로드까지 오라고 말했다. 내가 싱가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다면 오처드 로드하고 벤쿨렌 스트릿 그저 둘 뿐이다. 오처드 가는 벤쿨렌 거리를 찾기 위한 리퍼런스 였고 벤쿨렌 거리는 저렴한 숙소가 있다는 지역이다. 그것도 모두 2-3년전 정보라서 이제는 맞지 않았다. 몹시 지저분해서 싱가폴인들의 자존심에 사소한 흠집을 내왔던 벤쿨렌 거리는 철거되었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갔다. 내리자마자 그가 근무하고 있다는 가게를 발견했다. 가게 앞에서 전화하려니 카드식 전화기에다가, 하루 묵을 건데 카드를 구입하기는 애매해서 동전 전화기 찾느라 헤메다녔다. 서울과 똑 같았다. 거리를 돌아다니고 오처드 로드에 즐비하게 늘어선 백화점 건물마다 들어가 봤지만 몽땅 카드식 전화기였다. 지하철 구내로 돌아와 보니 동전 전화기가 보였다. 가게 앞으로 오란다.   

가게 앞에서 그를 보았다. 전에 사진을 본 적이 있어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라서 깨끗하게 차려입은 얼굴을 보니 왠지 기분이 영 아닌데? 사실 이 양반은 가게 안에 있는 다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다. 그가 들여보내서 가게 안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한밤중에 가끔 대화를 나누던 얼굴과 마주했다.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업무 시간 중에 찾아온 것이 미안해서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노라고 말하고 나왔다.   

백화점, 번화가는 체질에 잘 안 맞는다. 서울하고 다를 것도 없었고 백화점 들어가봤자 사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다. 거리 곳곳에 벤치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주욱 걷다가 수퍼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감을 사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홀짝였다. 그리고 찬찬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담배를 빨았다.
 
담배 꽁초 버리다가 걸리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벌금을 문다는 것을 깜빡 하고 꽁초를 바닥에 버렸다. 특이한 것은, 사람들이 무척 행복해 보인다는 점, 거리에서 깔깔 웃고 마음껏 얘기하며 다양한 인종들이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종종 관광객이나 여행객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들은 티가 났다.   

느긋하게 걸어 그들이 근무하는 가게에 도착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듯.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일하는 모양을 구경했다. 컨티넨탈 레스토랑인데 한 사람은 지배인이자 아줌마고 한 사람은 거기 종업원이자 아가씨였다. 작년에 icq로 만나 얘기를 했는데 왠일인지 내 얘기를 재밌어 했다.   

그들과 함께 보트키(boat que)로 갔다. 술집이 많은 동네라는데 여행객들에게 들은 정보로는 약간 비싸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들이 자주 가는 바닷가 옆 노천 술집에서 맹숭맹숭한 칵테일을 한잔 받아 마셨다. 칵테일인줄 알았는데 그냥 토닉 워터였다.
 
담배를 줄창 피우면서 밤 바다와 그 건너편에 늘어선 건물을 구경했다. 맹숭맹숭한 술이 별로여서 더 쎈 것을 달라니까 스카치 위스키를 갖다 주었다.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아줌마는 내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종이에 영어로 적어주어 대화했다. 내 악필은 워낙 한심해서 말도 같이 해줬다. 가게 실내에서는 밴드가 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몇몇 사람들이 락 음악에 맞춰 블루스인지 디스코인지를 추고 있다. 그 모양이 너무 점잖아서 우스워 보인다.   

넉 잔쯤 마시니까 알딸딸하다. 시간도 많이 흘렀다. 밤새 퍼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제 슬슬 숙소로 가보겠다고 말하니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왔다. 밤 거리가 한산하고 조용하다. 20분 쯤 걸어 숙소 앞에 도착해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내일 아침 나를 데리러 숙소 앞으로 와 주겠다고 말했다.   

숙소로 기어 들어가 잠들어있는 주인을 깨워 타월을 얻었다. 샤워한 후 방에 들어가 곯아 떨어졌다. 배낭은 가져온 그대로 풀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찌뿌둥하고 입안이 텁텁했다. 비좁은 도미토리 침대 사이를 가로질러 샤워장에 갔으나 이미 누가 안에 들어가 있어 오줌만 눗고 세면대에서 대충 얼굴만 씻었다. 배낭을 카운터에 맡기고 첵 아웃 한 후 아침 햇살이 비추는 숙소 앞 카페에 앉아 음료수와 물 한 병을 꼬박 다 마셨다. 약속 시간인 9시가 지났음에도 그들이 오지 않아 어제 술김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의아해했다. 방금 도착한 여행자 두 명이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 내가 묵었던 숙소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는 숙소 주인과 여행객들이 다시 나왔다. 숙소 주인이 그들을 어딘가로 안내해 주면서 내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하하. 그 양반은 정말 관상을 보는 것 같다. 내가 묵었던 방은 침대가 둘이나 있었는데...   

오겠다던 사람들이 왔다. 오전에는 근무를 안 하므로 나와 함께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다. 싱가폴에 볼꺼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11시쯤에 있고 나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쑤시고 돌아다닐 수 있다고 안심시켰지만 자기들이 안내를 해주겠다고 우겼다. 센토사섬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정작 나 자신이 전혀 대책이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들도 센토사 섬에는 오랫만에 가보는지 지하철을 타고 버스 타러 가는 길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다. 지하철을 타는 동안 아줌마가 내게 표를 빌려 주었다.  
 
센토사 행 버스 앞에서 한국인 여자 여행객 둘을 만났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가이드북이 한글이라서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니 웃어준다. 내 몰골이 좀 꾀죄죄한데다 일행이 있는 것을 보고 별 말은 나누지 못했다. 이런 값비싼 여행지에 놀러온 두 아가씨를 보니 수준 차이가 느껴진다. [센토사 섬 지도 보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Sentosa 섬, 싱가폴에서 만난 친구들. 왼쪽은 처녀, 오른쪽은 유부녀, 뒤에 있는 것은 용대가리.

버스표와 함께 입장권을 팔았다. 아줌마가 세 사람의 입장권과 버스표를 모두 지불했다. 난 멍청히 표를 받고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아줌마는 자기 딸과 핸드폰 sms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핸드폰 sms 사용이 무척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유원지라는 센토사 섬에 도착해 모노레일을 타고 중간 중간 내려서 나비 박물관이니 해양 박물관 따위를 구경했다. 그렇게 재밌지도 않았고 그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담배를 피우고 했지만 나를 잡는 경찰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entosa Island에서 바라본 싱가폴의 전경. 싱가폴은 그다지 깨끗한 곳은 아니었다.

오후 한 시쯤 되어서 맥주와 점심을 먹고 아가씨는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다. 버스 정거장 앞에서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는 나를 보고 작별인사를 한다. 나와 아줌마는 핑크색 돌고래 쑈를 구경했다. 한심한 쇼다. 하나도 볼 것 없는 쇼였다. 아줌마는 오늘 쉬는 날이라 하루종일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한다. 한심하게 작은 해변을 걸으면서 그녀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애는? 애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말한다. 응? 그걸 물은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더 물어볼 수도 없고. 남편이 자기에게 잘 안 해준다고 한다. 혼자 살꺼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한다.   

센토사 섬을 나오니 딱히 가볼만한 데가 없었다.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녀와 걸으면서 이런 저런 애기를 했다. 한국에 한번 놀러온 적이 있는데 그래서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내 생일에 보내준 생일카드에는 '안녕하세요?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한글로 적혀 있었다. 그녀가 자랑스레 보여준 한국어 교재는 참 적나라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 남녀관계 섹션을 보면 '벗겨 주세요' '아주 좋아요' '더 해주세요' 이런 말이 적혀 있어서 읽고 있는 내가 낯이 뜨거워졌다. 누군지 참 여러가지 상황 고려해서 책을 종합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심지어 수산물 시장과 야채 시장까지 골고루 관람한 후 오처드 로드로 돌아왔다. 서점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서점에 앉아 science 섹션과 science fiction 섹션에 앉아 이런 저런 책을 뒤적이다보니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저녁 먹으러 가자, 어떤 걸 먹고 싶냐? 나는 중국식에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근 중식을 먹겠다고 했고 꽤 유명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번호표를 받아 대기하다가 자리가 나서 들어갔다. 메뉴판은 홍콩에서 보았던 것과 형태가 비슷했다. 먹고 싶은 것에 체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아는 것이 없어 아줌마의 지도를 받아가며 몇 가지를 체크하니 다섯 접시가 차례대로 나왔다. 먹다가 배가 불러서 더 못먹을 지경이었지만 정말 맛있다. 아줌마가 다 계산해 줘서 난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가씨 보러 레스토랑으로 나를 안내해 줬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 아가씨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애인 사진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숙소에 잠깐 들러 배낭을 찾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더니 공항까지 마중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아줌마와 버스를 탔다. 버스는 넓고 쾌적했으며 TV를 볼 수 있었다. 거의 한 시간을 달려 창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가씨가 보낸 sms 메시지가 아줌마의 핸드폰에 떠 있었다.   

친구에게 작별인사로 포옹을 해주라는 충고였다. 고개를 가로젓고 히죽히죽 웃으며 그녀와 작별하고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했다. 공항은 포근하고 멋지게 생겼다. 세계 최고의 공항 다웠다. 심지어는 pda용 적외선 싱크를 할 수 있는 코너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면세점을 전전하며 술을 살까 망설이다가 관두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돈 한푼 없는 알거지가 된다. 말 그대로 진짜 알거지였다. 밤 11시 30분 쯤, 비행기가 이륙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항공기 창밖의 풍경. 해가 뜨고 있다. 오른쪽 구석의 빨간 점들은 U.F.O.

오사카 공항에 도착. 공항 대기실에는 몇몇 여행자들을 빼고는 아무도 없다. 화장실에서 배낭을 끌러 긴 팔과 긴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세수를 했다. 3시간 후에 이륙할 예정.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 셋 중 둘은 인도를, 하나는 태국을 다녀온 것 같다. 히죽히죽 웃었지만 대화에 굳이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 언제쯤 그리운 인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하철에서 찍은 사진 저 검은 배경 뒷편에 도사린 사람들

서울 도착. 점심 무렵. 공항을 빠져 나오자 찬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춥다. 꾸역꾸역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컴퓨터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벗은 후 보일러를 세게 틀어놓고 열대에서 보냈던 기분좋은 시간들을 상상하며 잠들었다. 
일주일 동안 사람들을 만나 두어 번 술을 마시고, 여행 얘기는 가능 한 하지 않았다.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돈도 없고 쌀도 떨어지고 해서 이력서를 이곳저곳 돌렸다. 저녁에 소개를 받고 이력서를 보냈다가 그 다음날 면접 보고 취직했다. 불과 한 달 전의 과거하고 단절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곳에서 행복했다.
 
- 2001.4.11 작성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5pm 비행기 출발. 7:00pm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도착. 입국 서류가 무려 4장이나 된다. quarantine, arrival card, declaration, 정체를 알 수 없는 카드 한 장까지.
 
환전소 앞에 섰다. 앞에 서 있던 일본인은 만엔 짜리 지폐 한 장을 환전했다. 그 뒤에 2000밧 지폐를 모두 링깃으로 환전한 나는 177링깃을 손에 쥐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는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은 만엔 짜리를 달랑 한 장 내고 400링깃 가량을 환전해간 그 일본인에게 왠지 자존심이 구겨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쿠알라 룸푸르 국제 공항. 저녁 하늘에 몰려든 먹구름.


공항에서 budget taxi나 셔틀 버스를 찾고 있는데 영어 잘하는 시커먼 말레이인이 다가와서 50링깃에 협상. 공항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그가 택시라 부르는 개인 차량에 승차. 영어가 통하니 말하기 편해서 좋다. 그래서 가는 내내 격렬한 토론과 대화를 주고 받았다.

마침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쿠알라룸프르가 처음이냐고 묻길래 그렇다, 여긴 무척 현대화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서 왔냐? 한국에서 왔다. 바로 왔는가? 아니, 태국여행 하다가 왔다. 지금은 F1 그랑프리 시즌이라서 숙소 구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오늘이 주말이라 숙소는 거의 다 차 있을 것이다. 아, 재수없을 때 왔구나, 하지만 숙소가 다 차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뭣하면 내가 숙소를 소개해 주겠다. 차이나타운 근처인가? 걸어서 20분쯤 가면 차이나타운이 나온다. 얼마냐? 70링깃이다. 난 그렇게 비싼 곳에서 묵을 형편이 못된다. 하지만 싼 곳은 좋지 않다. 아니다 난 싼 곳이 체질에 맞는다. 나는 가난하다. 그러지 말고 내가 말하는 곳에 잠깐 들러 확인해 봐라. 마음에 안들면 차이나타운에서 내려주겠다. 당신 정말 친절하군. 좋다. 내려서 확인해 보겠다.   

톨 게이트 앞에서 택시가 섰다. 톨 게이트 비용을 내라며 내게 69링깃이라고 새겨진 디지털 미터를 손가락질 한다. 아까 50링깃에 협상이 끝난 것이므로 당신이 알아서 내라, 나는 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69링깃을 내지 않으면 차가 톨게이트를 지나가지 못하고 자기는 돈이 없다고 말했다. 노, 라고 말했다. 50링깃 이상은 줄 수 없고 그건 너와 내가 합의를 본 금액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신 차는 정식 공항 택시가 아니지 않느냐, 가외로 벌이를 하고 있는 것 다 안다고 하니까 자기는 공항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비행기 도착이 늦어져 할 수 없이 돌아가는 길에 나를 태운 콜택시라고 우겼다. 속으로 놀고 있네 라고 생각하면서 그럼 공항 택시 운행 허가증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팔짱 낀 채 버티고 있다보니 내가 타고 있는 차 때문에 이쪽 게이트의 뒤로 차들이 늘어섰다. 적체. 나는 누가 옳은지 끝까지 가려보자는 심정으로 그와 토론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뒤에서 빵빵 거리는 차량과, 요금을 재촉하는 검표원 때문에 안절부절하던 운전수는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고 차를 일단 출발시킨다.   

창밖으로 폭우가 내리고 있다. 양동이로 퍼 붓는 것 같다. 말레이지아는 지금 우기다.
 
운전수는 내가 리무진 영업 라이센스를 보여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화가 났는지 글로브 박스에서 무슨 서류를 꺼내 흔들어 보인다. 내가 확인해 볼테니 달라고 말했지만 주지 않는다. 보나마나 그의 운전 면허증일테니까. 그래서 당신은 불법으로 영업하는 주제에 50링깃이면 충분한 비용을 19링깃을 더 얹어서 나를 등쳐먹으려 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자기가 지금 거짓말장이로 보이냐고 오히려 소리를 지른다. 그렇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고 하니, 날더러 어떻게 살았길래 사람을 믿지 못하느냐고 말하면서 가이드북을 뒤져 보라고, 가이드북에 보면 공항에서 시내까지 80여km를 가는데 리무진 택시 비용이 얼마로 나와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말했다. 실은 가이드북이 있긴 했지만 거기 나온 공항은 KLIA가 생기기 이전 것이라 비교할 수 없다. 그걸 보여주면 20링깃이 채 안되는 비용으로 시내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그걸로 사기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는 더 정확한 자료가 있었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려 앞을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다. 그는 내가 화를 낸다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돈 몇푼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고 말이다. 난 돈 몇푼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거라고 말했다. 궁지에 몰린 운전수는 핑계거리가 떨어지자 중산층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여행 가능한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인데 당신은 중산층 이상이기 때문에 이곳과 태국을 여행할 수 있는 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민족은 친절하고 거짓말을 안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고 말한다.
 
논지를 보면 당신은 한국인이라 거짓말을 하고 돈이 있으니까 여행을 할 텐데 몇푼 더 내게 준다고 크게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푼돈을 주지 않겠다고 우기며 나와 싸우려 하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운전수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필요성을 느끼고, 내가 여행하는 방식에 관해 조목조목 설명을 늘어놓고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나는 그 비용 이상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내가 당신에게 지불하는 50링깃은 태국돈으로 500바트쯤 하는데 그 돈이면 내가 태국에서 5일을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운전수의 얼굴에 경멸과 조소, 그리고 환희의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 지금 500바트로 5일을 살 수 있다고 말했지? 나는 태국에 가 보았다. 어림없는 거짓말 하지 말아라. 500바트로는 5일을 지낼 수 없다. 나 역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놈, 제대로 걸렸군. 그리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30바트 짜리 숙소에 묵으면서 20바트 짜리 식사를 두 끼하고 10바트 짜리 과일주스를 두 번 정도 마신다. 그것 외에 어디로 이동하거나 가외비용을 쓰지 않는다면 하루에 내가 쓰는 돈은 딱 100밧이다.   

운전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말한 중산층에 당신도 속한다. 하지만 나는 중산층처럼 여행하지도 않고 그래본 적도 없다. 내가 쿠알라룸푸르에서 숙소를 잡는다면 50링깃 짜리면 고급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KLIA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셔틀버스가 어떤 것이 있고 가장 싸게 시내로 들어가는 방법도 알고 있다. 가장 싼 방법으로 들어가면 단 돈 3.5 링깃이면 충분하다. 나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50링깃을 지불하고 이 차를 탄 것이다. 왜냐? 고생스럽게 여행중이라 쉬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이틀간 변변한 숙소를 잡기는 커녕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비가 멎었고 그는 내게 형편없이 깨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기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우겼다. 그가 추천해주려던 숙소 앞에 차가 섰지만 나는 내리지 않았다. 약속대로 차이나타운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못 믿는다고 궁시렁거리며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때마침 그의 모빌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끝끝내 자신의 거짓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통화 내용을 통해 확인했다. 전화는 자기 딸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 그는 딸에게 지금 집으로 들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만일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나를 태웠다는 말부터 거짓이 된다. 비행기가 연착이 되더라도 손님을 내버려두고 나를 태운 채 들어왔으면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백화점처럼 보이는 건물 앞에 차가 멎었다. 그에게 차이나타운 푸드라야 터미널 앞에 세워달라고 말했었다. 그는 내리는 나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악수하면서 히죽 웃어 주었다. 얼굴이 시꺼먼 거짓말쟁이 새끼도 히죽 웃었다. 공항에서 차이나타운까지 50분쯤 걸렸다.   

내리고 나니 당황스러웠다. 4년 전에 만들어진 가이드북을 들춰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런 책을 샀을까? 영문 보기 귀찮아서 한글로 된 책을 샀는데 정말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다. 간단히 말해, 4년 전부터 있었던 지명지물은 그대로 있지만 4년이 지난 후 없어진 지명지물들은 찾을 수 없었다. 가이드북의 지도는 축적이 표시되지 않은 한심한 것이었다. 인도와는 달랐다. 인도는 5년전 가이드북이나 지금 가이드북이나 금액만 다를 뿐 그게 그거였다.   

이곳 저곳 떠돌아 다녔다. 밤 아홉시가 넘자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트래블러스 문 롯지를 찾아 헤메다가 시간도 늦었고 해서 차이나타운 한 복판에 있는 차이나타운 Inn으로 들어갔다. 팬룸으로 59링깃이나 하는 호텔이다. 더블 베드에 TV가 있지만 창문이 없다. 샤워 했다. 뜨거운 물이 나온다. 돌아다니는 숙소마다 정말이지 호사스럽기 그지없다. 내 팔자에 무슨 호텔에 묵으려는 것일까, 오늘 하루만 벌써 100링깃 이상을 썼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나온 것이 타격이 컸다. 게다가 바보하고 논쟁까지 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생각 좀 하면서 움직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텔 차이나타운 인의 입구. 1층은 Ground Floor. 우리식으로 2층이 그네들 1층이 되기 때문에 로비나 카운터는 보통 2층에 있다.


차이나타운을 돌아다니며 환전할만한 곳을 찾아 보았다. 은행이 몇 개 있다. 뭔가 좀 먹으려고 두리번 거리다가 로칼들이 가는듯한 노천 식당을 발견했다. 맥도널드 건너편 왼쪽 골목 구석탱이에서 뭘 시켜 먹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갸웃 거렸다. 주방장이 큰 소리로 fried noddle을 먹겠냐고 묻는다. 화로에서 샛노란 불이 치솟아 오르다. 오케이. 그걸 먹겠다. 나온 모양을 보니 짜장면하고 꼭 빼닮았다. 한국 짜장면하고는 틀리지만 맛이 괜찮고 3(3*360=1080원) 링깃이라는 가격에 비해 양이 무척 많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차이나타운 인 주변 약도.



밥 먹고 숙소로 돌아와 그동안 밀린 빨래를 했다. 맞은 편 침대에 늘어놓으니 가관도 아니다. 가이드북이나 뒤져볼까 하다가 뒤져봤자 재미 없을 것 같아서 관두고, TV를 보았다. 영어 방송이 있다. 보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10:00am, 피곤했나보다. 시차 때문인가? 따지고 보면 태국 시각으로 9:00am에 일어난 것이 맞다. 빳빳하게 마른 옷가지들을 챙겨 짐을 꾸리고 짐을 호텔에 맡기고 근처 식당에서 나시 아얌과 콜라를 먹었다. 쥐꼬리만한 양에 7 링깃이나 했다. 너무 비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차이나타운의 거리 모습. 앞 아저씨가 호기심을 참지 못해 내 카메라를 한참 들여다 봤다.


아뿔싸... 오늘은 일요일. 은행이 문을 연 곳이 없다. 하여튼 여행 초기부터 재수가 없다. 돗대기 시장같은 푸드라야 터미널에서 13링깃에 카메룬 하이랜드 행 버스표를 사고 잠깐 인터넷을 사용했다. email 확인하기도 귀찮고 들락거릴만한 홈페이지도 없다. 서울에 있을 때와 달리 여행 중에는 인터넷이라던가 email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말끔히 사라졌다. 인터넷 중독도, 컴퓨터 중독 증세도 없다. 서울에서는 증세가 있었다.   

화장실을 찾아 우연히 올라간 터미널 3층에 문을 연 은행이 있었다. 80$을 환전하니 300 링깃. 거리에서 사람들이 즐겨 먹는듯한 milo를 1링깃 주고 사먹었다.   

바글거리는 카운터에서 버스표를 예매. 버스를 타라는 shell 주유소 앞으로 걸어갔다. 카메룬 하이랜드(CH)행 버스표를 팔고 있었다. 바보같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정신없는 버스 터미널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표를 샀는데...   

대도시에는 별 흥미가 없어 쿠알라룸푸르 관광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실 둘러본 곳이라고는 차이나타운 밖에 없지만. 그래도 별로 후회할 것 같지 않다.
 
버스가 출발. KL의 시가지는 말끔하고 현대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서울보다 더 잘 사는 나라처럼 보인다. 널직한 도로에 깨끗한 건물들, 사람들 대부분이 핸드폰을 들고 있다. 옷 입은 모양새들이 깔끔하다. 여행 한답시고 돌아다니는 내 모습은 KL의 골목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1시간쯤 버스가 달리다가 중간에 한번 정차했다. 근처 매점에 들어가 물건들의 가격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비싸서 아무 것도 안 사고, 안 먹고 그냥 버스에 올랐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2시간쯤 지나서 밀림으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버스는 오르막길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고산지대라서 그런지 한국의 자연환경과 흡사한 것 같다. 열대식물이 차츰 사라져 간다. 4시간 후 작은 촌락에 버스가 멎었다.   

카메룬 하이랜드에 도착. 거리가 한산하고 조용하다. 여행자들이 추천하는 다니엘스 롯지를 찾아갔다. 방은 모두 꽉 차 있었다.
 
도미토리로 기어 올라갔다. 벽돌 벽이 그대로 드러난 구석 자리, 허름해서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이거라도 어디냐 싶어 짐을 풀어놓고 거리를 둘러보기 위해 숙소를 나왔다. 시내라는 것이 걸어서 15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직선 도로. 허기를 느껴 식딩에 들어가 나시 고랭 아얌과 티를 시켰다. 나온 차를 보고 기겁을 했다. 인도의 짜이하고 똑 같았다. 말하자면 밀크 티, 하지만 설탕을 넣지 않아서인지 맛이 다르다. 마치 KL에서 먹은 볶은 면이 모양은 짜장면 같지만 맛이 짜장면이 아닌 것처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메룬 하이랜드의 작은 공원에 걸려 있는 도시 개요


숙소에 돌아와서 무료라는 정글 트래킹을 신청하고 카메라를 충전하기 위해 침대로 올라가 벽을 더듬으며 콘센트를 찾았다. 없다. 옆에 누운 양키에게 ac outlet있냐고 물으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거참.
 
그와 얘기했다. 싱가폴에서부터 중고 오토바이를 하나 사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친구였다. 음울한 표정으로 지도와 가이드북만 뒤적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사람들 만나 대화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 적게 나온다고 말했다. 내게 버터워즈를 통해 가는 국경 코스 말고 다른 길이 없냐고 묻는다. 아는 바가 없어서 모른다고 대꾸했다. 그의 말로는 태국과 말레이지아 사이에 비정규적인 국경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왜 그런 곳을 통해 가려 하냐고 물었다. 밀입국자가 되면 골치 아프지 않냐고. 그는 그런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상한 친구다. 

침대 위에서 밍기적거리기가 지겨워 밖으로 나왔다. 탁자에 앉아 pda를 꺼내놓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greg egan의 distress. 우스운 것은 틈틈히 넉넉한 시간이 생기면 읽으려고 pda에 잔뜩 쑤셔 넣어두었던 소설을 여행 중에 거의 읽지 못했다는 점. 기껏 읽으려고 pda에 눈길을 주고 있노라면 어느새 졸기 일쑤였다.   

한 친구가 오늘 정글 트래킹에 관한 '모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가 말하길, 자기는 오늘 코브라를 봤으며, 코브라에게 쫓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 친구는 그걸 진지하게 들으며 자기는 평생 야생 뱀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숙소에서 일하는 친구가(그는 자신이 내일 트래킹 가이드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실거리며 웃었다. 뱀 같은 것은 없고(트래킹 코스에) 당신이 만일 뱀을 봤다면 딱 두 가지 길 밖에 선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live or die. 말하자면 가이드는 그 친구가 뻥을 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나도 그 녀석이 뻥을 친다고 생각했다.   

저녁. 시내로 걸어가 식당을 둘러 보았다. 말레이지아의 식당은 거의 전부가 food court 스타일로 운영되는 것 같았다. 말레이 음식, 중국 음식, 태국 음식, 인도 음식 등등 한 나라에 구겨져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 만큼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많기 때문에 여러 음식점이 커다란 한 지붕 아래에서 각각 코너를 맡아 영업을 하고 있다. steambot라는, 끓는 물에 갖가지 재료를 데쳐먹는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혼자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양, 동행이 있어야 먹을 수 있어서 침만 꿀꺽 삼켰다. 사태 꼬치 몇 개 먹어봤다. 볶은 면을 시키면 여지없이 짜장면 같은 것이 나왔다. 차를 시키면 짜이가 나왔고 테이블에 있는 바나나는 공짜였다.   

다시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러 나왔다. 가이드북을 본 바로는 10시만 넘으면 마치 중국처럼 가게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거리가 조용하고, 나이트라이프가 없어서 여행객이나 관광객에게는 시시한 동네가 말레이지아 라고 소개되어 있다. 밤이면 떠들썩해지는 태국과는 사뭇 달라서 왠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술만 마실 수 있으면 된다. 문을 닫으려는 편의점에 들러 기네스 맥주를 한 병 사서 벤치에 앉아 마시며 간간히 보이는 산악 꼭대기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숙소로 돌아왔다. 모기가 많다. 노출된 살갗에 모기약을 뿌렸다. 라오스에서 태운 살갗이 아직 덜 벗겨져서 피부에 지도를 그려놓은 것 같다. 옆에 앉아 있는 녀석이 기타를 잡고 november rain 등등을 부르고 있는데 어디가나 이런 놈이 하나씩 꼭 있어서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는 점이 희안하다. 게다가 그 되도않는 노래를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박수를 치며 앵콜을 외치는 미친놈도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정말 그랬다. 박수를 치며 앵콜을 외치더니 어느새 듀엣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 더더군다나 그러다보면 무슨 전염병처럼 옆엣놈, 옆엣놈들이 따라부르기 시작한다. 나도 따라 불렀다.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그런데 troubled를 발음할 때 자꾸 travelled로 바뀌었다.   

무려 4일이나 밀린 일기를 썼다. 일기라기 보다는 그냥 시간표에 가까웠다. 몇월 몇일 몇시에 어디어디 도착. 어디어디 출발. 적기 귀찮아서 끄적여 놓은 것이 없다. 왜 적는가? 할 일이 없어서다. 잠들 때까지 소설을 읽었다. 간만에 여유다. 여기에 오길 잘했다.   

8:00am, 아침햇살에 잠에서 깨었다. 도미토리에 작은 창이 있었다. 자주 날짜를 잊어버려 pda를 꺼내 확인해 봐야 했다. 오늘은 2월 26일, 앞으로 대략 10일쯤 남았다. 캄보디아에 안 가고 대신 말레이지아로 온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돈은 좀 들더라도 말레이지아가 말이 통하니까 편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스트 하우스에서 책 읽다가 문득 찍은 맑은 하늘


샤워를 하려고 배낭을 뒤져보니 수건이 없다. 아... 도착한 날 방콕의 홍익인간에 묵을 때, 수건을 말리려고 걸어놓고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이제서야 생각난다. 그후로 줄곳 이동하느라 잠을 안 자거나 호텔같은 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거기서 제공되는 수건을 쓰느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프론트에 가서 수건을 빌리니 하루에 1링깃, 걸레같은 수건을 하나 빌려준다. 주인은 중국인, 종업원은 말레이인. 말레이지아에 도착한 후 내가 본 가게들은 그런 도식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다니엘스 롯지도 기실 운영되는 형태를 보면 중국인 여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고 열쇠는 중국인 주인이 보관하고 있으며 종업원은 절대 손 댈 수 없다는 점, 체크아웃할 때 그래서 종업원에게 계산할 수 없고, 돈이 되는 물건들이 놓인 모든 장소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어서, 담배같은 것은 종업원에게 살 수 없다. 전형적인 중국식이다. 전형적인 중국식 상술에는 이런 것도 있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고객을 설득하며 어디에나 금액이 붙어 있다.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는 과장이 없고, 또한 거짓이 없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지엽적인 한계와 내 주관적인 인상으로 중국식 상술을 특정짓자면 그것들 대부분이 생색내기였다. 하여튼 그들은 장사를 잘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메룬 하이랜드, 타나 라타의 중심 시가 전경. 여기서 저 끝까지가 시가지의 전부. 왼쪽은 식당가. 오른쪽도 식당가다. 간혹 기념품 가게나 우체국 따위가 끼어 있다.


 시내에 내려가 조그만 중국인 식당에 들렀다. 미 수프(noddle soup)와 티를 주문. 카메룬 하이랜드에는 티 농장이 있기 때문에 어디보다 차가 맛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주인 아저씨가 돈을 내고 돌아서려는 내게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해서 깜짝 놀라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얼른 정신을 차린 후 나도 히히히 웃으며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내가 한국인임을 금새 알아본 것이 놀랍다. 선물가게에 들러 엽서를 사서 한국에서 열심히 덜덜 떨며 일하고 있을 사람들이 충분히 약이 오를만한 간단한 메시지를 적은 후, 부쳤다.   

로비에서 10:05am에 중국식 여사가 제공하는 FREE guided trekking 출발. 개 두 마리가 까불거리며 따라온다. 두 놈 다 숫놈인데 한 놈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면 눈알을 부라리고 한 놈은 얌전했다. 공원을 지나 폭포 같지도 않은 폭포를 지나 산으로 올라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고원의 모습

전망대 꼭대기에서 독일인이 갑자기 맥없이 풀썩 쓰러졌다. 두어 친구가 달려가 우려를 담은 주의깊은 표정으로 독일인을 돌봐주었지만 둘 다 응급처치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독일인은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셔츠 앞 단추를 열고 그늘에 반듯이 누인 후 수건을 개서 얼굴을 식히고 맥박을 쟀다. 맥박을 재봤자 무슨 뜻인지 해석이 안된다. 맥박이 빠르긴 해도 규칙적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단지 체력이 딸리고 피곤해서 자빠진 것처럼 보인다. 상의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Brinchang의 작은 시가. 대부분 리조트와 게스트 하우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트래킹 중에 찍은 사진. 워낙 느리게들 걸어서 사진 찍을 여유가 있었다.


 마침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데다 올라온 지 30분도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조금 쉬다가 내려가면 될 것 같다. 한 친구가 그를 따라 내려 가기로 했다.
 
일행이 열 댓명이나 되니까 무슨 애들 소풍 분위기가 난다. 굼벵이들처럼 걷다 보니 세 파트로 나뉘어서 너댓명씩 무리가 형성되었다. 선두그룹에 끼면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므로 그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앞에 걸리적 거리는 사람들이 있고 길이 좁고 미끄러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글 풍경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글 풍경 #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글 픙경 #3


독일인이 쓰러진 후 얼굴에 긴장감이 돌면서 쓸데없이 웃으며 말들이 많다. 1시간쯤 지나 너비 5-6미터쯤 되는 공터가 나타났다. 가이드는 가는 다리에 비쩍 마른 몸매지만 산길에 익숙한지 날렵하게 날아갔고 숨 한번 몰아쉬지 않았다. 일행중 숨 한 번 몰아쉬지 않는 친구는 가이드와 나 정도. 일행을 둘러보니 동양인은 나 밖에 없다.
 
담배를 꺼내 그 친구와 사이좋게 나눠피우자 서양애들 인상이 일그러졌다. 어떤 젊은 금발 여자가 담배는 건강에 안 좋다느니, 폐에 나쁘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늘어 놓는 동안 가이드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이 바보야, 이런 트래킹 한 두번 해보냐? 하는 듯한 공모적인 미소. 가이드는 좀 더 일찍 이곳에 왔더라면 산길 마라톤에 참가할 수 있었을 꺼라고 말했다. 나는 맥주를 안 들고 온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 친구가 날더라 무척 산길에 익숙하다고 하길래 고향에서 나를 squirrel boy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그저 낄낄거렸다. 

산정이나 절간으로 갈 사람은 가란다. 다만 우기라서 가는 도중에 늦으면 비를 맞을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 산길을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산정으로 갈까, 절간으로 갈까 하다가 길을 익혀둔 후에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나도 내리막길을 택했다.
 
내려가는 길 내내 짹짹거리는 앞 여자들에게 갈증을 느끼지 않냐며 물을 너무 자주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느니 하면서 껌을 권해 주었다. 껌을 씹느라 그들은 한동안 조용했다. 

계속 걷다가 Mardi라는 곳으로 나왔다. 길을 따라 주욱 가면 시내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다시 정글로 향했다. 오르막길을 '다람쥐 소년' 답게 팔짝 팔짝 뛰어 올라갔다. 땀 때문에 안경 시야가 뿌옇다.
 
뛰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멈췄다. 길 중간에 어떤 서양 여자애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마터면 부딫힐 뻔 했다. 혼자 낭만을 즐기고 있었나 보다. 앉아 있으면 나뭇가지에서 벌레 떨어질텐데? 오히려 나를 강간범이라도 되는 듯 두려운 표정으로 쳐다 보았다.
 
아까 잠시 머물렀던 교차로에서 땀으로 축축한 몸을 말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트래킹 코스의 중간, 갈림길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산정 쪽으로 향하다가 길을 잃었다. 트래킹 코스 지도를 들고 오지 않아 길을 알 수 없다. 별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햇살이 약해지는 것을 보니 한두 시간 후면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남쪽 사면을 따라가면 마을 사람들의 경작지가 나올 것 같다. 출발한 방향이 동쪽이었으므로 아침에 올라왔던 코스로 돌아가려면 서쪽으로 향해야 한다. 희미한 여러 갈래 길의 흔적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면서 한 번 남쪽으로 틀었다. 작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던 흔적이 뚜렷이 있었다. 비교적 산이 크지 않은데다 지나온 길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라서 길을 발견하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하늘이 어두컴컴해서 서둘러야 했다. 비를 피할만한 마땅한 곳이 없다. 우기에 비 맞으면 아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글 풍경

뛰기 시작했다. 공기가 눅눅해지면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개울이 나타나고 개울을 따라 계속 진행하다 보니 조그만 정자가 보인다. 빗줄기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간신히 정자에 도차했다. 정자에 짱박혀 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나중에는 마치 물의 커튼이라도 친 것처럼 맹렬하게 쏟아져 내린다. 떨어진 빗 줄기가 사방으로 튀었기 때문에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갔다. 거센 바람이 불면서 빗 줄기가 휘어진 채 정자 안으로 비스듬히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비다. 순식간에 주변의 작은 잔디밭이 연못처럼 변하고 맨 땅에는 골이 파이면서 1~2cm 두께의 도로 넓이만한 빗물이 휘몰아치며 커다란 뱀처럼 꾸물꾸물 움직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슬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가 그친 후 마치 포연처럼 솟아오르는 안개


 
 
신발 속에 슬쩍 슬쩍 끼어 들어간 풀과 흙을 털어내고 PDA를 꺼내 소설을 읽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비가 멎었다. 비가 맞으니까 나무숲 사이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하늘로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를 피해 정자로 날아든 벌레


미끄러운 오솔길을 따라갔다. 지금 내린 비로 이제는 어엿한 폭포같아진 폭포를 거쳐 시내로 돌아왔다. 8시간 동안 산길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더니 출출하다. 어제, 오늘 짜이 맛도 보고 했으니 이번엔 인도 음식이 그리워져서 인디언 레스토랑을 찾아다녔다. 타운 구석에 인도인 식당이 있었다. 간만에 '고향의 맛'을 보려고 탈리와 바나나 랏시를 주문했다. 짜파티 대신 조그만 과자 쪼가리를 줘서 서운했지만 맛은 좋았다. 다 좋았는데 7.3링깃이나 했다. 탈리를 먹어봤다는 하잘것 없는 사실로 자신을 위로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보니 카운터에 서 있던 트래킹 가이드가 한국인들이 왔다고 말해 주며 숙박계를 들춰 보인다. 웃었다. 한국인이라... 내일 떠난다고 미리 말하고 시내를 빈둥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와 샤워하고 라운지에 앉아 PDA를 꺼내 소설을 읽었다. 

누군가 다가와 한국인이냐고 영어로 묻는다. 예절바른 사람이구나 싶었다. 만나는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한국인이세요?' 라고 한국어로 물었다. 두 한국인은 부부였다. 둘 다 김영사의 가이드북 필자인데 마침 내가 산 책이 김영사의 헬로 시리즈라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 놓았다. 타이 북부와 라오스, 캄보디아 등을 엮은 책은 다 좋은데 앙코르와트 사진이 너무 많다. 오히려 그곳에 가면 사진에서 본 거기네? 라며 감흥이 반은 줄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사진작가의 '작품'인 탓에 사진이 지나치게 멋있게 나와 있다. 가이드북이 가이드나 잘할 것이지 무슨 사진 작품집 내는 것인가? 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남편이 술병을 사러 시내로 나갔다.   

그동안 아내되는 분과 얘기하다 보니 옆 자리에 앉아있던 서양애가 대화에 슬며시 끼어 들었다. 속으로 '염병할 놈'이라고 욕설을 늘어놓았다. 평소에는 나같은 동양인 남자가 말을 먼저 건네기 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동양인 여자가 있으니까 대화에 얍삽하게 끼어드는 타입이랄까. 게다가 과자까지 주며 환심을 사려고 했다. 과자를 얼른 집어 먹었다. 염병할 놈이라고 말했지만 선량하고 순수하게 생긴 것이 무슨 영화에서처럼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종류의 사랑을 하다가 절망한 나머지 여행을 떠난 순수한 청년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아내'는 영어가 잘 안되는지 버벅거리다가(나보다 더 버벅거려서 반가웠다) 예절에 어긋나게도 그를 무시한 채 나와 한국어로 오손도손 얘기했다.   

남편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45도짜리 술. 한국인을 만난 세 번의 기회 모두 술을 마셨다. 한국인을 안 만나면 나 혼자 맥주라도 한 캔 씩은 꼬박꼬박 먹어줬다. 술 안 먹겠다고 결심했지만 어쩌다보니 계속 술을 마시게 된다. 한 병을 거의 나 혼자 먹은 셈이 되었다. 그들은 취재를 하면서 좀 쉬어 보려고 태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에게 동남아에서 어디 가볼만한 곳 없냐고 물으니 필리핀을 추천해 준다. 기회 되면 그곳에 한 번 가보겠다. 부부의 도움으로 말레카와 싱가포르에서의 숙소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렇잖아도 한심한 가이드북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부가 그려준 약도. 나중에 이 약도를 보고 이게 무슨 뜻일까 궁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술 먹는 중에 설명을 들어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몰골을 보고, 내가 트래킹을 즐긴다는 사실을 안 후, 남편은 숙소에 들어갔다가 '엄마의 마지막 산, K2'라는 책을 건네주었다.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책이라서 준다고 말한다. 두 부부가 한번씩 읽었는데 재미있다고 하더라. 가이드북 얘기와 출판사 얘기하다가 시공사를 씹었더니 날더러 출판계 사정을 잘 안다며 놀라워 했다.   

약간 쌀쌀하다. 목이 말라 6시쯤 깨어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깨어보니 8:30am, 이빨 닦고, 세수만 했다. 1링깃 주고 타월을 다시 빌리려니 주인장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수건이 없어 물묻은 얼굴을 옷깃으로 대충 닦고 시내로 내려가 버스 시간표를 보았다. 그리고 비 훈 수프를 시켜 먹었다. 나쁘지 않다. 해장에 된다. 오늘도 인간들 복장을 긁어놓기 위해 엽서를 정성스럽게 써서 부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주소를 적어올껄. 후회스럽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한국인 부부에게 인사하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Tapah 행이 있다. 하루에 한 대 꼴로 KL로 가는 버스가 있다. 이틀전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인도차이나 반도를 횡단하고 있다는 친구가 내게 말하길, 쿠알라 캉사르에 가면 말레이지아 최고의 모스크가 있는데 오후 두시쯤 해가 천정에 떠올랐을 때 모스크를 바라보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 한다. 숙소는 더블 라이온 호텔이 좋다. 그래서 그 친구 말을 듣고 카메룬 하이랜드에서 며칠 더 묵다 가기보다는 쿠알라 캉사르에 들렀다가 타이핑에 들렀다가 말라카로 가는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냥 찍어본, 새까맣게 탄 얼굴

10:20am, 타파로 출발. 뒷좌석의 10대 여자애가 워낙 시끄럽게 웃어대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버스간에 앉은 외국인은 나를 포함해 다섯. 그중 한 친구는 뉴질랜드 교사인데 뒷좌석에 앉은 두 여자를 요리하느라 정신없다. 짜증이 나서 귀를 막고 있다가 슬슬 들려오는 그의 재담이 재미있어서 어느새 나도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도 저런 말솜씨를 가져봤으면 좋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메룬 하이랜드의 특산물인 차를 재배하는 차밭 풍경 사진 잘못 찍었다고? 전선 지나간다고? 그게 어때서?


타파에 가면 Ipoh행 버스가 있다고 적혀 있는데 4년이나 지난 내 멋진 가이드북은 어디에서 이포행 버스를 탈 수 있는지 적어놓지 않았을 뿐더러, 타파에 가보니 이포로 가는 버스가 없었다. 멍청이처럼 서성이다가 챠도르를 뒤집어 쓴 꼬마애들에게 이포행 버스를 어디서 타느냐고 물으려 하니까 가까이만 가도 꺄르르 거리며 도망간다. 그래서 아무나 붙잡고 물었더니 이포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Kampar를 거쳐 가야 한단다. 여기서 기다리면 캄파르 가는 버스가 온다고 일러 주었다. 이빨이 거의 다 빠진 아저씨인데 묘하게 발음은 잘 나왔다. 외국인을 처음 보는 아저씨였다. 댕큐 스마일, 댕큐 베리 머치 앤 스마일.   

황인종 여자가 차도르를 쓰고 다니는 이유가 기억났다. 황인종 아가씨가 이슬람교도와 결혼하면 이슬람 율법에 따라 그걸 뒤집어 쓰고 다녔다. 그 집에서 태어나는 아가도 뒤집어썼다. 챠도르는 왜 쓸까? 목선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까? 치마를 입어 허리와 다리선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맞다. 이슬람 여성 복식은 성욕이 전혀 안 생기는 패션이다. 정말 똑똑한 놈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버스 좌석에 적힌 글귀: Mei Siong like to make 3-side sex! 어디가나 애들이란...


Kampar에 도착. 버스 터미널에서 물어물어 Ipoh행 버스에 올랐다. 로컬 버스 답게 모든 정거장에서 한번씩 섰다. Ipoh는 대도시 티가 났다. 내리자마자 타이핑행 버스를 찾아 보았다. 근처에서 Taiping행 버스가 바로 출발할 기세라 창구에서 재빨리 표를 사서 뛰어 올랐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다 썩은 버스다. 휘발유 냄새가 지독해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우연히 차창을 바라보다가 카메론 하이랜드에서 본, 오토바이 몰고 태국 간다는 친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침 오르막길이라 내가 탄 똥차는 거의 속도를 내지 못하고 헐떡이며 간신히 고갯마루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시원스럽게 버스를 추월한다. 나도 언젠가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해 보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멋있어서 찍은 캄파 부근 골목 어귀의 풍경. 앞에 놓인 것들은 가스통들.

졸다가 깨어 내리니 거리가 생소해서 어리둥절. 알만한 지형지물이 눈에 띄지 않았고 가이드북의 거리 모양과 다르다. 혹시 Taiping 위쪽에 있는 Kammuting이 아닐까? 10여 분쯤 북쪽을 향해 걸었다. 여기가 타이핑 이라면 2-3분도 채 안되어 저자거리가 나오고 사거리가 나와야 하지만 비포장 도로가 나온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버스 터미널로 돌아왔다.   

택시 기사들이 친절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카뮤팅이란다. 엿먹을. 타이핑 익스프레스를 탄 기억이 나는데 왜 카뮤팅에 온거지? 그걸 따지려고 버스 운전수를 찾으니 원래 여기가 종착지고 타이핑에서 내가 안 내린 거란다.   

한 택시 기사에게 타이핑까지 얼마냐고 물으니 5링깃을 불렀다. 대충 거리를 계산해 보고 4링깃에 가겠다니까 고개를 젖는다. 당신 여기서 노는 것보다 날 데려다 주는게 낫지 않냐고 하니 고개를 다시 젖는다. 똥배짱이다 이거지? 그럼 버스 타러 가겠다고 하니까 버스같은 거 없다고 오히려 배짱을 튀기더라. 콧방귀를 끼고 카뮤팅에서 타이핑 가는 버스를 알아보러 창구에 가서 슬쩍 여기서 타이핑까지 가는데 택시가 얼마냐고 물으니 4링깃이란다. 빙고! 손가락 넷을 자신있게 펴고 포 링깃! 하면서 택시 기사들 사이를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아까 배짱을 튕기던 기사가 내 팔을 잡고 자제를 촉구하며 자신의 택시로 데려가 내 배낭을 손수 그의 트렁크에 넣어 주셨다. 아이구 고마워라.   

에어컨도 없고 라디오는 어디론지 사라진 썩은 택시다. 코너를 돌 때마다 차체가 비명을 지른다. 굴러가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타이핑 시내로 들어가면서 이것 저것 물었다. Maxwell hill까지는 짚차로 2.5링깃. 박물관과 형무소 등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형무소에 사람 있냐고 하니 없단다. 그럼 박물관? 고개를 끄떡인다. 버스 터미널에 내려주었다. 터미널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페킹 호텔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타이핑에 별다른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들어가 가격을 물었다. 27링깃. 방을 보니 주인이 자랑스럽게 에어컨을 켜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뜨거운 물을 틀어보였다. 1929년에 지어진 역사와 전통의 지독한 곰팡내가 나는 썩은 호텔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초호화판 싱글 룸인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킹 호텔의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 썩어가는 호텔 내부 모습


흡족한 마음에 이틀 묵을 꺼라며 깎아달라는 말을 깜빡 잊고 안했다. 그러다가 그들의 결재장부를 흘낏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28링깃에 묵고 있었다. 1링깃 싼 것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 이틀치를 한꺼번에 계산했다.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CH 보다는 그나마 큰 동네인데다 The Store라는 커다란 할인판매점이 있다. 시장, 학교, 경찰서, 박물관, 도서관 등등 없는 것이 없었다.
 
공원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길가를 따라 주욱 늘어서 있다. 길을 가로질러 벤치가 있는 잔디밭을 건넌 무수한 가지들이 물가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작은 시내와 아름다운 공원. 

잔디밭에 드러누워 찬찬히 지고 있는 태양을 얼핏 바라 보았다. 공원을 두른 작은 오솔길을 따라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물 위에는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땀을 식히며 pda를 꺼내 소설을 읽었다. 타이핑이라는 중국식 이름답게 정말 태평스러운 도시다. 마음에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름다운 호수 공원의 모습. 앞에 하얀 것들은 꽃.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맥스웰 언덕.


하늘이 흐려져 비가 올 듯하여 시내로 천천히 걸어왔다.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커다란 food court로 향했다. 식사가 싸고 종류도 다양하고 그럭저럭 먹을만하다. 3링깃 정도면 음료수와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아... 흡족하다.   

샤워하고 땀에 절은 옷들을 빨았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 떨어지는 소리가 멎은 것이 8시쯤. 선선해진 바깥으로 나가 막 들어선 저녁 시장을 구경했다.   
정력제 선전은 어디가나 똑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거진 실물같은 자지를 꺼내 어디가 어떻고 이래서 좋다는 말을 하는 듯. 6시쯤 저녁을 먹었음에도 시장을 돌아다니며 나시 아얌과 옥수수를 마가린에 버무린 것, 그리고 air tofu라는 것을 샀다. KL에서 air tofu를 보고 공기가 잔뜩 들어간 치즈같이 생긴 두부를 연상했는데 air=ice, 즉 차가운 두부, 정확하게는 아이스 두유같은 것이다. 대단히 맛있다. 들고 숙소로 가져오는 도중에 다 마셔서 수퍼에서 국화차를 하나 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400원 짜리 저녁 식사. 시장에서 사온 나시 고랭(밥에 닭을 얹은 것), 옥수수, 그리고 차.


숙소에서 맛있게 식사. 그렇게 다 해도 4.7링깃 밖에 들지 않았다. '엄마의 마지막 산 K2'를 다 읽으니 새벽 한시쯤. 10시부터 읽었으니 3시간 걸린 셈. 재미 없고 그다지 얘기하거나 권해주고 싶은 책은 아니다. 

자기로 하고 실링 팬은 끈 채 에어컨만 돌렸다. 새벽에 에어컨 바람이 추워서 깨어 에어컨을 껐다. 이 무슨 호사란 말인가!!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때를 벗겼다. 두 번이나 탄 살이지만 껍데기를 벗겨도 안쪽 역시 타서 피부가 붉은 갈색을 띠고 있다. 보온병에 들어있는 물이 아직 따뜻해서 커피를 타 마셨다. 몇몇 모기 물린 상처가 보인다. 잘 때 팬이라도 켜 놓고 자야겠다.   

옷을 줏어 입고 관광 안내소를 찾아 갔으나 문이 닫혀 있다. 박물관인 줄 알고 찾아간 곳은 정부청사.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빌어먹을 가이드북은 안들고 다니기로 했으므로 물어물어 박물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꼬마 여자애(인도애 같은데)에게 물어보니 길을 알려주고 얼른 도망가더라. 박물관 쪽으로 걸어갔다. 강아지보다 겁들이 많다. 아까 길을 알려준 여자애가 자기 가족들에게 외국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자랑을 늘어놓으며 나를 손가락질 했다. 할 일 되게 없는 곳인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정부청사. 1898년 오픈. 햇빛이 들어오는 정문은 닫혀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882년에 지어진 도서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883년 지어진 Perak Museum. 페락주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나 내용은 보잘 것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장식 칼들. 사진을 찍을 수 없다지만 그냥 개무시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랑 아슬리(원주민)이 제작한 탈들. 탈에는 조상의 얼이 스며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물론 식인종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형편없게 생긴 경찰서 물론 가장 최근에 지어진 듯.


박물관은 아담했다. 별로 볼만한 것들이 없었고, orang asli(원주민)의 박물을 보아도 아무 감상이 생기지 않았다. 다만 게스트북을 뒤져보니 방문객중에 외국인이 거의 없었다.   

형무소에 들러볼까 하다가 날이 더워지기 시작해서 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김에 다시 관광 안내소에 들렀다. 이번에는 문을 열었다.   

10:00am, 안내원을 꾸짖으려다 말고(9:00am에 문을 연다고 바깥에 적혀 있었다) 지도를 좀 구할 수 있겠냐고 물으니 싹싹하게 이것저것 건네주면서 다음 목적지를 묻고 그쪽 지역 관광 안내도까지 주었다.
 
그녀가 일정을 묻는다. 이곳에서 rest in peace 하려고 한다니까 수줍게 웃었다. 귀여운 아가씨다. 게스트북에 사인하려고 보니 최근 타이핑을 방문한 외계인은 나밖에 없었다. 어쩐지 신났다. 그간 여행객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동네만 돌아다니다보니 정신세계가 날이 갈수록 황폐해지고 있었는데 비록 동물원 원숭이처럼 사람들이 한참 쳐다본다 해도 별로 사람 때가 타지 않은 곳에 왔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IC(관광 안내소).


이전에는 경찰서 였고, 소방서 건물이었다고 한다.

각 도시의 안내서를 잔뜩 나왔다. 인사를 정말 귀엽게 하는 아가씨다. 잡아먹고 싶다. 생각난 김에 공원 부근에 있는 동물원에 잠깐 들러보기로 했다. 

지도에는 꽤 가까운 것처럼 보였지만 땡볕 아래서 한 시간쯤 땀을 질질 흘리며 걸어서야 동물원이 나타났다. 그나저나 공원을 일주하는데 한 시간 반쯤은 걸릴 것 같았다. 공원의 규모가 실감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국인들은 어디 가든, 공원 구석구석에 용을 심어놓길 즐기는 듯. 저건 용의 잔등 쯤 된다.


동물원 입장료 4링깃, trem을 타려니 2링깃짜리 표를 끊어야 한다. 걸어다니느라 지쳐서 타기로 했다. 마침 국민학생들이 동물원 견학을 와서 트렘을 거의 통째로 전세내다시피 했다. 아이들이 무척 짹짹거려서 시끄러웠다. 선생 마저 짹짹거렸다. 오히려 선생이 동물들을 보고 더 흥분한 것 같았다. 선생이 아이들에게 동물 이름을 가르쳐 줄 때 우리에 있는 명패를 슬쩍 쳐다보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하긴, 선생이라고 다 알 수는 없는거지. 나도 한국어로는 동물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영어나 학명으로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동물이 하도 많아서 어이가 없다. 

아이들이 종이 한 장 펼쳐놓고 자신이 본 동물에 체크 마크를 열심히 해 나가고 있었다. 몇몇 동물은 그 종이쪽지에 적혀 있지 않았다. 유난히 귀여워 보이는 아이에게 선심 쓸 요량으로 이런 저런 동물들 이름을 가르쳐 주고 어디어디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물속에서 한가하게 떠 다니고 있는 거북을 가르키며 저건 거북이야(터틀)라고 가르쳐 주었다. 아이는 트렘 난간에 기대 터를!, 터를! 하고 소리쳤다.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발음이 나보다 낫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그 애가 모르는 짐승의 이름을, 그것도 r이나 v, f 자가 들어간 짐승 이름을 잘못 발음해서 가르쳐 준다면, 교육상 안 좋을 것 같다. (빌어먹을!)
 
트렘에서 내렸다. 입 다물고 선생과 아이들이 짹짹대는 그 속에서 느려터진 트렘을 타고 가다보니 길가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나를 정신지체아라도 되는 것처럼 희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특이하게 혼자서 시꺼먼 코끼리가 수도를 코로 틀어막으며 장난을 치고 있다.


사진기는 없다고 속였기 때문에 입장료 외에 추가 비용은 들지 않았다. 몇몇 동물들 사진을 찍었다. 의미없는 사진들이다.
 
동물원은 동물원답지 않고 무슨 방목장 같았다. 배꼽 높이의 철창이 달랑 우리와 도로를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린과 타조와 놀았다. 구경하던 학생들과 중국인 여자애들이 동물들과 사이좋게 잘 놀고 있는 나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흐뭇하다. 4링깃이 그다지 아깝지 않았다. 간혹 아무 것도 없는 빈 우리를 보고 있으면 그 동물의 사후 처리가 문득 궁금해졌다. 호랑이와 사자 새끼는 기껏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온 손님을 개무시한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서비스 정신이 부족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봉사정신이 부족한 코뿔소들


동물원을 나와 아름다운 정원을 정처없이 떠돌다가 지쳐서 나무 그늘에서 쉬며 타이핑 소개 소책자를 뒤적였다. 공원은 본래 주석 광산이었던 것 같다. 중국인 주석 채굴 노동자들이 말레이 반도로 끌려와 열심히 삽질해서 만들어놓은 땅에 물을 채우고 잔디를 심고 관리해서 이런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대부분 정강이 높이 정도 밖에 안된다. 그 사이로 비단잉어같은 물고기들이 돌아다녔다. 수심을 얕게 해 놓은 것은 증발을 돕기 위해서인 듯. 그래서 공원 주변은 시원한 편이었다.
 
거의 중국인들로 구성된 이 도시는 과거 페락 주의 주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에 한 번 큰 불이 난 후 건물을 새로 짓고 도로 정비를 하면서 심은 나무들이 적어도 100년 이상의 나이를 먹게 되었다. 봄에는 그 나무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고, 마치 벚꽃처럼 꽃잎이 휘날린다고 한다. 볼만한 광경일 것이다.
 
인도 펀잡 지방 사람들을 지역 경찰로 고용했다는 것이 특이했다. 영국 식민지 였으므로 인도인들을 수입(?)해 오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영국 귀족들은 펀자비들의 전형적인 특징인, 훌륭한 떡대와 얼굴을 뒤덥은 구렛나루, 그리고 머리를 두른 커다란 푸른색, 붉은 색 터번에 적당한 권위를 부여했던 것 같다. 그들은 정말 경찰로 어울렸다. 아무도 덤비고 싶은 기분이 안 들테니까.
 
마음에 드는 도시, 마음에 드는 공원이다. 그늘에 누워 책을 읽거나 졸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수 공원의 경치. 잔물결 하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틀 동안 즐겨 앉았던 공원의 나무 그늘. 아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름드리 나무들(Pterocarpus indicus)이 호수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말레이지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로수지만 타이핑의 가로수는 100년 이상 자라왔다. 긴 가지들은 도로를 가로질러 호수에 닿아 있다.


오후 느즈막히 다리께에서 빈둥대다가 현지인과 얘기를 나눴다. 그의 말로는 페킹 호텔에서 매춘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국가라 매춘이라면 꽤나 쎈 처벌을 받을 것 같은데, 매춘이라던가 매춘부가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가 그렇다고 우겼다. 사실 그 호텔 꼬라지를 보건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결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신혼부부. 그림같은 배경은 좋은데 신랑, 신부가 팍삭 늙었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시켜 먹었다. 차까지 합쳐 3링깃으로 떡을 친다. 숙소에 잠깐 들러 샤워하고 관광안내소에서 받아온 안내서를 뒤져보니 가이드북보다 나았다. 다음 여행지의 숙소 문제가 걸리적거리긴 하지만 카메룬 하이랜드에서 한국인 부부에게 얻은 정보로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시내 주변을 돌아 다니며 사진을 몇장 찍었다. 이들의 건축양식이 흥미롭다. 모르고 볼 때는 그저 그랬지만 타이핑의 역사를 소상히 알게 되니까 건축물의 세세한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사와 건축물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한번은 여자를 이해하려고 난리쳤고, 이번에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greg egan의 마침 읽고 있는 책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데, 중간에 주인공이 세속적인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다소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어제 읽은 제임스 발라드의 '엄마의 마지막 산, K2'처럼 위선적인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883년 지어진 킹 에드워드 7세 학교 운동장. 올 잔디 그라운드. 축구를 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말레이식과 식민지 식이 섞인 부실한 건물

사용자 삽입 이미지

킹 애드워드 7세 학교 건물. 잘못 찍은 사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적어도 3가지 양식이 섞여 있는 듯한 건물.

사용자 삽입 이미지

1884년에 지어진 Halaman Pasar. 파사르는 광장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말레이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

KFC. 말레이지아에서 닭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건물 앞에 있는 것은 주차기 미터. 건물은 썩었어도 거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국식 건물.


 다섯시쯤, The Store 앞에 앉아 빈둥거렸다. 언제 비가 올지 몰라 공원에 갈 수는 없고(어제도 이맘때쯤 비를 피해 숙소로 돌아왔다) 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미국만 다인종 국가가 아니다. 말레이지아는 말레이, 인디언, 차이니스, 타이 등 동남아인들의 집결지로 보이는데, 매우 사이가 좋아 보인다. 그런데 차이니스는 적응을 잘하는 종족일까? 동남아 어딜가나 중국인이 있다.   

어떤 아줌마가 내게 다가 오더니 손을 불쑥 내밀며 동전을 건네 주고 걸어갔다. 뭐라고 할 새가 없었다. 생각해보니까 그 아줌마는 날 거지취급한 것 같다. 동전을 살펴보니 20센트짜리였다. 어이가 없군.   

버스 터미널에 들러 Kuala Kansar행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식당가에서 2.2링깃짜리 닭밥 하고 닭 다리(1.5) 하나, 에어 토푸(0.6)을 사 갖고 숙소에 와서 먹었다. 오늘도 '싸고 맛있고 푸짐한 현지 식사'에 성공한 것이다.   

방에 물이 떨어져서 물 달라고 말해놓고 담배 사러 The Store에 갔다. 주인이든 점원이든, 싱글싱글 웃기만 한다. 왜 나한테는 여자를 방에 들여다 줄껀지 안 물어보는 걸까? 외로워 죽겠는데.
 
줄 서서 기다리느라 담배 하나 사는데 30분이 걸렸다. 담배 한 갑에 4.9링깃, 내 앞에는 엄청나게 큰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 가는 아이가 있었다. 흘낏 가격을 보니 4.5링깃이었다. 정상적인 기준에서 보더라도 식비로 4링깃을 쓰고 음료수 사느라 1링깃 정도 소비하는 이 여행은 지나치게 가난한 것이다. 하루에 숙박비를 합쳐 50링깃이면 뒤집어 썼다. 대략 17000원 수준. 그런데 아이가 10링깃~20링깃 쯤은 우습게 사용하는 듯 싶다. 화폐 감각으로는 1링깃이 천원 정도 되는 것 같다. 말레이지아가 상대적으로 잘 살거나 내가 가난해서 4.9링깃짜리 담배를 사 들고, 4.5링깃 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아이에게 경악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pda를 뒤져보니 14일 동안 30만원 가량 썼다. 그중 절반이 술값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국식 콘센트에서 220V 전원을 사용하려면 윗 구멍을 저렇게 쑤셔야 플러그가 들어간다.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오산에 도착. 만남의 광장에 들르니 아직 문을 안 열었다. 근처 인터넷 까페에서 메일 구경이나 하다가 비누 하나 사고 만남의 광장 여행사에서 라오스 국경 부근으로 가는 버스를 알아 보았다. 불행히도 오후 16:00에 출발. 비자는 18:00에 나온다고 했다. 비자 생각만 하면 바보짓을 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앞으로 비자를 여행사에 맡길 때는 신중히 생각을 해 봐야겠다. 괜히 좀 편해보려고 했다가 오히려 여행을 망치는 내가 한심했다.   

배낭을 만남의 광장에 놔두고 북부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가면 17:00 이후 표가 있을 것만 같았다. 친절한 경찰 아저씨의 도움으로 19:15분 표를 예매. 그것밖에 없다. 비자를 17:00에 받고 간신히 터미널에 도착할만한 시간이랄까... 에어컨 버스도 아니고 일반 버스라 예매라고 보기는 뭣했다. 터미널에 나가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면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찰이 딱지를 떼고 있다.

 
방콕에서 숙소를 안 잡아 마땅히 씻을 장소가 없어 화장실에 들어갔다. 허물이 벗겨지고 벌겋게 달아 염증이 생긴 코를 수선하고 카오산으로 귀환. 국수가 맛있다는 가게에서 국수를 먹고(맛있다. 아. 맛있다. 내 세포들이 치를 떨며 좋아했다) 만남의 광장으로 돌아왔다. 국수맛과는 상관없이 기분이 대단히 좆같다.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동시에 엿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두통이 생겼고 두통약 하나 먹었다. 근 일년동안 두통약을 거의 안 먹었는데 비자 때문에 두통약을 먹는게 더더욱 한심하게 느껴져 머리가 더더더 아파지는 듯. 만남의 광장에 배낭을 맡겨놓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죽치고 앉아 있으니 이모저모로 미안해 한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카오산에 널려있는 환전소 중 한 군데에서 100불짜리 지폐를 환전. 4226밧. 그리고 여행사에 앉아 이제나 저제나 패스포트가 라오스 대사관에서 도착하길 기다렸다. 다섯시라니까 네시 반쯤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안달해서 물어보니 아직... 이란다. 버스를 놓칠 지 몰라 남 속타는 줄도 모르고 매정하게 대꾸하는 그 인간의 멱살을 잡고 빨리 내 여권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5:40pm, 누군가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사 앞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가방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쫓아가서 여권을 손에 쥐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사원 뒤로 빠른 걸음으로 가보니 6:00pm. 방콕의 교통 체증은 악명이 높다. 여기서 북부터미널까지 가는데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는데 30번 버스 한 대가 그냥 지나갔다. 다음 버스가 도착할 때 쯤에 도로의 거진 중간에 서서 손을 흔들어 버스를 세웠다. 눈가에 땀방울이 맺혔다. 더위 때문에 짜증이 났다.   

퇴근 시간과 겹쳐 시내의 교통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직 1/4도 못 갔는데 6:20pm이 지났다. 게다가 정류장마다 꼬박꼬박 버스가 선다. 악운이란 악운을 몽땅 몰고 다니는 사나이 정상돈의 오늘 운도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거리에 있는 모든 신호등마다 걸릴 수가 있는 것일까.
 
6:40pm.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반성했다. 도대체 여행을 어떻게 하려고 마음 먹었던가? 왜 이렇게 초조하게 서두르는가? 오늘 못가면 내일 가면 되지. 버스표 195밧이 아까워서, 시간에 늦을까 봐 허둥대는 꼴이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타이밍 칼 같이 맞춰서 승하차를 반복하던 승객들에 대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늦으면 내일 가자. 운이 좋으면 버스를 놓치지 않겠지. 교통상황이 최악이었지만 버스는 꼼지락 꼼지락 거리며 시내를 빠져 나갔다. 시내를 빠져나오자 마자 굉장한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들썩일 정도로 급 브레이크를 밟아 정류장에 섰다. 갑자기 길이 훤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반 버스의 내부 모습. 모든 창문이 열려 있고 모든 문이 열려 있다.


도착하니 7:10, 출발시각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뛰다시피 플랫폼을 찾아갔다. 버스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물병을 하나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7:30에 출발했다. 20분이나 늦었다. 한숨 돌리고 그제서야 버스를 살펴보니 완전 썩은 고물 버스였다. 에어컨은 물론 없었고 천정에 달린 선풍기들은 반쯤 고장난 상태, 그래서 창문과 앞문을 활짝 열고 달렸다. 좌석은 빽빽하니 왼쪽에 둘, 오른쪽에 셋 있는 것이 영락없는 시골버스였다. 고속도로에서 쌩쌩 달리는 차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이 창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옆 좌석에 앉은 태국인들은 위스키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는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첫 정거장에서 차장이 호객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잡상인들이 버스에 올라와 먹거리와 시계를 팔았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너무 잘 먹어 뱃살 나올까봐 아무것도 안 샀다. 첫 정거장에서 20분쯤 정차. 와우. 죽여주는군. 이거 정말 시골버스 아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시골 버스 정류장의 모습. TV를 보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승객들.

 
정거장처럼 보이지않는 곳에서 갑자기 버스가 섰다. 운전수와 차장이 내리더니 버스의 옆구리를 벌리고 공구상자를 펼쳐 렌치와 스패너로 여기저기 손보기 시작했다. 기름칠도 했다. 그동안 사람들은 버스 바깥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쭈그리고 앉아 버스를 고치는 모양새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도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면서 구경했다. 다 고쳤는지 운전수가 자리에 앉고 차장이 뭐라고 소리치자 사람들이 꾸역꾸역 버스 뒤로 걸어가 버스를 밀기 시작했다. 나도 버스를 밀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완전 인도하고 똑 같잖아!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썩은 버스는 인도의 타타 버스와 백퍼센트 일치하는 운행방식을 쫒고 있다. 운전석 앞에는 라마승 액자가 걸려있고 그 앞에 빨간 등이, 뒤에는 파란등이 퀴퀴하게 켜져 있다. 모든 정류장마다 버스가 꼬박꼬박 정차하며 호객행위를 했기 때문에 버스는 금방 만원이 되었다. 의자에 세 명이 끼어 앉아 있으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 밤이 깊어지자 문이 열려있는 탓에 바람이 쌩쌩 불어와 에어컨 버스 못지 않게 추웠다. 

짐칸에서 배낭을 뒤져 오버복을 꺼내 걸쳐 입고 자다깨다를 반복하다가 대머리가 벗겨진 차장이 내리라서 내렸다. 새벽녁이다. 오전 6:00am. 농카이에 도착.
 
잠이 덜 깨어 어리벙벙해 있는데 삐끼가 뛰어오더니 국경가냐고 묻는다. 간다고 하니 50밧을 달란다. 히죽히죽 웃으며 말 한 마디 안하고 서 있었다. 알아서 30밧까지 떨어지길래 그의 툭툭에 올랐다. 매우 신나게 달린다. 국경 앞에서 정차. 여권을 자랑스럽게 들고 태국 국경을 통과했다. 소문과는 달리 국경은 아침 6시부터 열려 있었다. 잠깐 화장실에 들러 얼굴을 쳐다보니 새카맣다. 푸켓에서 탄 껍질은 거의 벗겨졌으므로 이상하다 싶어 얼굴을 문질러보니 숯검뎅이 같은 것이 묻어났다. 매연 때문이다. 

태국과 라오스의 국경인 메콩강을 가로지르는 우정의 다리가 있다. 걸어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피곤해서 10밧을 주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라오스 국경 근처에 가자 어쩐지 풍경과 공기 냄새가 미묘하게 바뀐듯한 기분이 들었다. 출입국 카드를 작성했다. 서너 명의 외국인들이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툭툭에 합승해서 가려는 듯. 툭툭이 작고 비좁아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나는 협상 잘 해서 50밧에 택시타고 위앙짱 아침시장까지 가기로 했다. 아직도 졸음이 덜 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차창 밖으로 바라본 라오스 거리의 모습. 포근하고 시원하다. 앞에 보이는 조그만 점들은 자전거를 타고 '수도'로 출근하는 시민들


택시 운전수는 영어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 내가 하는 말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다. 얼마 버냐고 물으니 자기 딸 얘기를 했다. 아침시장에 도착해서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아쁠사... 100바트 짜리 한 장에 20밧 짜리 한 장, 10밧 짜리 한 장과 동전 몇 개가 있었다. 환전 후 단위가 큰 돈만 남아 있던 것을 잊어버렸다. 게다가 환전소에서 얼마쯤 환전하는 것을 졸려서 잊어버렸다. 거스름 돈을 만드는 뾰족한 방법도 없고 어쩔 수 없이 그에게 100밧을 주었다. 아울러 행운을 빌어주었다. 


아침시장에서 태국돈을 써먹을 방법이 없어 일단 환전을 해야만 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고... 근처 식당에 들어가 손짓발짓 해서 쌀국수 한 그릇 시켜먹고 500밧을 내밀자 잔돈이 없다면 거절. 30밧을 건네 주었다. 물가가 잘 감이 안 잡히지만 30밧이면 많이 준 것 같다. 식당에 짐을 맡겼다. 조리실쯤 되는 듯 한데, 닭들이 활개치고 있었다. 식당 종업원들이 나를 외계인 쳐다보듯이 쳐다 보았다. 라오스 국경을 들어서자 마자 입만 다물면 난 거진 라오스인이었을텐데?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헤헤 거리는 것을 보니 외국인 구경 처음하나 보다. 사바디 하고 인사하니 헤헤 웃으면서 인사한다. 사람이 순해 보인다. 

터미널에서 주위를 느적느적 배회하며 은행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8:00am, 30분쯤 걷다가 라오스 관광청에 들러 지도를 얻었다. 지도란 것이 달랑 복사지 한 장이다. 복사가 흐릿해서 뭐가뭔지 알아볼 수가 없다. 이런걸 어떻게 한 국가의 수도에 있는 관광청에서... 라고 생각했으나 아가씨가 생글생글 웃길래 나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하고 나왔다. 그래! 여긴 공산국가야! 가난한 사람들이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오스 관광청에서 얻은 왕위앙 소개 책자. 자세히 안 보이지만 가운데 지도는 손으로 그린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리에서 야채를 파는 채소장수들. 그런데 은행원이 은행에서 불쑥 걸어나와 야채를 사더라. 그 앞에 파라솔은 사탕수수를 짜내 음료수를 파는 곳.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오스 독립기념문. 그 앞의 황량한 도로. 라오스 최대의 번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스 대사관 앞의 운치 있는 도로. 역시 라오스 최대의 번화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길에 풀이 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0 kip 짜리 지폐. 100 kip은 돈도 아니다. 그래서 사용조차 하지 못했다.

라오스 최대 도시(수도)의 중심가는 썰렁하기 그지 없다. 몇몇 단층 건물들과 호텔 및 식민지풍의 관공서 건물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지방도시 외곽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보행자용 신호등은 전기 절약을 위해서인지 꺼 두었고, 도로는 포장을 하다만 상태. 보행자 도로는 곳곳에 풀들이 블럭을 뚫고 솟아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침 시장 부근의 버스 터미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버스 내부. 앞에 보이는 왼쪽 사람은 방물장수, 옆 사람에게 물건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 8:30am쯤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 가지고 있는 밧을 전부 킵(kip)으로 환전했다. 환전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카운터 너머로 한 직원이 커다란 가방을 금고에서 꺼내 돈다발을 바닥에 쏟아 부었다. 화폐가치가 워낙 떨어져서인지 지폐 넉 장을 주고 건네받은 라오스 지폐는 3센티 두께의 한 뭉치였다. 왠지 은행이라도 턴 것처럼 흐뭇했다. 

영어는 애시당초 통하질 않으니 버스 터미널에서 '왕위앙'을 외쳤다. 프랑스식 발음으로는 위앙짱은 비엔짱, 왕위앙은 방비엔 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10시쯤 출발하는 009번 버스를 찾았다. 일본의 경제지원의 일환으로 받은 버스같다. 할 일도 없고 해서 길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상자에 담아 목에 매달고 돌아다니며 파는 꼬마애와 흥정을 하면서 놀았다. 아무 것도 안 사니까 울상을 지어서 껌을 하나 사 주었다.
 
한 시간쯤 기다리자 사람들이 버스에 하나 둘씩 타기 시작했다. 버스는 금새 미어 터졌다. 차장이 통로에 의자를 갖다 놓아서 열 남짓 한 사람들이 앉고 통로 사이 사이마다 빽빽하게 콩나물처럼 사람들이 들어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위앙 가는 길. 논과 산은 한국의 그것처럼 정겹고 친숙하기 그지 없었다.

4시간 동안 의외로 잘 포장된 길을 달렸다. 흑백사진으로 보았던 오랜 옛날 한국의 모습을 닮은 촌락과 붉은 논밭. 황소는 한국과 똑같이 생겼다. 차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약간 차가웠다. 차만 타면 꾸벅꾸벅 졸았다. 내 앞에 앉은 부부의 아기가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날 쳐다보는게 즐거운 모양이다. 기괴한 모양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물댓 명의 여행객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리니 내린 곳 앞에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방위를 잘못 읽어 동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돌아왔다. 벌판은 비행장 터였다. 10분 가량 뙤약볕에서 걸었더니 벗겨지기 시작한 살갗이 다시 타기 시작했다. 논에 불을 놓아 연기로 눈 앞이 따끔거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숙소의 모습. 침대를 받치고 있는 것은 콘크리트 구조물. 매트리스를 들어보면 대나무로 얽어놓은 텅 빈 공간이 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여지없이 부실하다.

지치기도 했고, 눈에 띄는 게스트 하우스에 들러 가격을 물어보았다. 싱글룸은 없고, 4만킵. 비싸 보인다. 4000밧을 환전해 20만 킵 정도가 있었다. 이 정도면 라오스 여행에 무리가 없을꺼라고 생각했는데... 가이드북의 게스트 하우스 단가는 아무리 비싸봐야 2만킵 내외였는데 생각해보니 라오스의 극심한 환율 변동을 고려하지 않은 듯 싶다. 더 싼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볼까? 이틀간 차를 타고 돌아다녔고, 어젯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데다 아침부터 쏘다녀서 온 몸이 너절하고 나른하다. 오늘은 그냥 푹 쉬고 싶은 기분뿐이다. 덜컥 첵인하고 짐을 풀었다. 온수 샤워가 된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니 피로가 조금 가시는 기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숙소에서 바라본 비행장터. 비행장터 오른쪽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창문이 열려 있고 커튼이 없는 탓에 본의 아니게 벗고 자고 있는 서양 여자애를 창문 너머로 보았다.


잠깐 밖에 나가 강변을 산책했다. 다리를 건널 때 500킵을 받았다. 안 내려고 개기다가 피곤해서 그냥 주고 말았다. 다시 건너올 때도 500킵을 받으려고 한다. 다리에서 뛰어내려 강물을 첨벙첨벙 걸어갔다.
 
아이들이 물가에서 자맥질을 하며 대나무 작살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한쪽 구석에서는 불을 피워놓고 꼬치에 꿴 물고기를 굽고 있었다. 좀 달라고 하니까 화들짝 놀라며 도망간다. 꼬치를 들고 먹을까 하다가 말았다. 땅에 꽂아놓고 자리를 떴다. 여자애 둘이 강가에 앉아 노래를 부르면서 뜨게질을 하고 있었다. 평화롭다. 

버스 터미널 께로 향하는 길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도 내가 한국인인임을 알아챈 듯 한데, 별로 말을 걸고 싶은 기분이 안들어 슬쩍 지나쳤다. 이국 땅에서 한국인을 만나도 반갑지 않은 것은 왜일까?
 
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채운 바게뜨와 성분이 의심스러운 콜라 원액에 얼음을 타서 비닐봉지에 넣어준 것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태국의 과일쥬스가 불현듯 그리워진다. 태국과 달리 열대과일들이 별로 없는 탓인지 과일쥬스가 성행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숙소에서 바게뜨를 우걱우걱 먹으면서 다음 일정을 계산해 보았다. 왕위앙에서 이틀, 루앙프라방에서 하루, 배를 타고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 훼이싸이까지 이틀, 훼이싸이에서 국경을 넘어 메홍손으로, 메홍손에서 치앙라이까지. 치앙라이에서 하루. 짐을 맡기고 트래킹을 하다가 치앙라이에서 방콕까지 가는 여정을 궁리했다. 캄보디아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캄보디아에 들르면 말레이지아는 거의 그냥 통과하고 싱가폴로 바로 가야할 형편이다.
 
잠이 안와 멀뚱멀뚱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는 콘크리트로 바닥에서 50센티쯤 쌓아놓고 그 안을 대나무 줄기로 엮어놓은 다음 매트리스를 올려놓은 것이다. 객실 밖으로 나와보니 베란다에서 서양애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책 제목이 해리 포터길래 말 몇 마디 붙였다가 재밌다길래 할 말을 잃었다. 뭐가 재밌다는 건가. 

저녁 8시쯤. 여전히 잠이 안 와 잠깐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오직 200여 미터 짜리 길 하나가 번화가의 전부인 시내로 나왔다. 누군가 '한국인이세요?'라고 묻는 말에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대낮에 길에서 보았던 한국인들이다. 고개를 끄떡이고 히죽히죽 웃은 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번화가의 끝에는 외국인 여행자를 상대로 하는 술집이 여럿 있었다. 호텔로 다시 돌아오다가 음식점의 야외 벤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한국인들을 다시 보았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피로회복에는 맥주가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들과 합류했다. 맥주 한 병에 6000킵. 오라지게 비싸군. 네 명은 각각 따로 여행하던 사람들인데 베트남에서 하나둘씩 만나 모이다가 어느새 동행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다고 한다. 그중 한명은 인도에서 왔다. 자칭 황태자라고 하는 남자애가 하나 있어 맥주 한 잔만 달랑 마시려니 감칠맛이 나던 참이라 한 잔 더하기로 하고 그들의 숙소 근처로 갔다. 

가는 길에 파파야를 샀다. 커다란 파파야를 4000킵 정도 했다. 내 생각엔 2000킵이면 충분해 보이는데. 맥주도 그렇고, 바게뜨도 그렇고, 숙소도 그렇고 왠지 마음에 안 든다. 가격들이 너무 비싸다. 위스키 한 병을 시켜 먹었다. 라오라오였다. 숙소에 관해 투덜거리자 자기들은 싱글룸에 22000킵 주고 묵고 있다고 한다. 황태자를 따라 숙소를 구경하러 갔다.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 그가 자신이 혼자 마시던 위스키를 방에서 들고나와 그것도 마저 마셨다. 알딸딸한 정도가 지나쳐 꽤 취한 듯 싶다. 새벽 한 시쯤 되어 모두와 헤어져서 숙소를 향해 걸었다. 길을 좀 헤메고 나서야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많이 취했다. 침대에 쓰러져서 죽은 듯이 잠들었다.   

아침 아홉시. 오랫만에 제대로 숙면을 취해 몸은 개운했지만 위장이 쓰려 속을 풀어줄 무언가가 애타게 그리웠다. 가이드북을 뒤져 똠얌빠(생선 똠얌)을 하는 곳을 찾았다. 똠얌빠와 쌀밥을 시켜 배를 채우고 시내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식당에서 바라본 강 주변 정경

그리고 어젯밤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 찾아가 주인에게 물어보니 방이 하나 있단다. 25000킵. 역시 더블 침대. 3000킵 정도 비쌌지만 22000킵 짜리와 달리 트윈 베드였다. 흥정할 기분도 아니고 얼른 어젯밤을 보낸 숙소에서 첵아웃 한 후(아줌마가 싱글룸이 하나 비었다며 25000에 해주겠다고 했지만 방금 갔던 곳은 include bath였고 이곳은 그렇지 않아 거절) 짐을 자전거에 싣고 첵인했다. 주인이 친절하고 방도 마음에 든다. 바로 옆방(2호실)에서 어제 함께 술을 먹은 한국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간단히 짐을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위앙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의 모습. 기숙사를 갖추고 있다. 적어도 5-60명의 아이들이 조그만 공 하나로 축구를 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위앙 리조트에서 동굴로 가는 강 중간의 다리에서 바라본 상류의 모습. 평화롭다.


수박 쉐이크 한 잔 시켜먹고 동굴을 향해 떠났다. 자전거는 라오스적으로 삐그덕 거렸다. 포장이 안 된 도로를 따라 대나무로 지은 집들이 눈에 띄었다. 대나무를 얇게 통으로 벗겨내 그것을 엮어 벽을 만들어 놓은 집들, 태풍 한방이면 모조리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그간 태풍이 불지 않았는지 집들이 꽤 되어 보였다. 집 주위에서는 땅 속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깊은 생각에 잠긴 돼지들이 물끄러미 땅을 바라본 채 서 있었고 비호처럼 날렵한 수탉들이 휙휙 날아다녔다. 

물어물어 남쪽으로 내려가 왕위앙 리조트로 들어갔다. 리조트라는 것이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짓다만 흔적, 땅을 파헤쳐 시멘트로 구획을 잡아놓은 도로와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다. 다리를 건넜다. 몇몇 외국인들이 좀비처럼 그곳을 방황하고 일본인둘이 벤치에 앉아 있다. 안내판을 보니 11시부터 오후 1시 까지는 동굴이 영업을 하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노인네가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조그만 소쿠리에 들어있는 찰밥을 조금씩 떼어 입에 넣고 건포처럼 생긴 고기를 살짝 뜯어먹는 것이 식사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제스쳐와 웃음으로 대화를 했지만 서로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는 밥 먹었냐? 안 먹었으면 이걸 좀 먹어볼래? 라고 말했고, 나는 속이 안 좋아 화장실에서 볼 일을 봐야 한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 문제 없다. 들어가서 일 보라. 화장지는 저기 있다. 라고 말했고, 아. 나한테도 있어요. 라고 말했다. 말했다? 그렇게 말한 거나 진배없다.
 
시원하게 일을 보고 다리를 건너 느적느적 걷다가 동굴에서 흘러나온 초록색 물을 쳐다 보았다. 맑은 물 속에 미끈하게 생긴 고기들이 유유하게 놀고 있었다. 발 담그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사람이 별로 없어 좋다. 그 옆에는 스킨헤드 둘이 물고기들에게 돌을 던지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어디 가볼만한 곳이 없냐고 물으니 근처에 동굴이 많다고 말한다. 머리는 닭처럼 밀었지만 참 공손한 스킨헤드였다. 이래서 여행을 하며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니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위앙 리조트 안 쪽에 있는 2층 폐가의 모습. 대나무를 엮어 벽을 만들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물론이고 가옥들이 대게 벽이 얇다. 대체 밤에 부부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회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 수심은 대략 2미터 가량.


동굴 근처에 다다르자 안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미국인 커플이 튀어 나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아니 그들의 가이드북에 따르면 애들이 동굴 안내를 해주려고 따라 온다는데 아무도 없다며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애들은 커녕 까마귀 한 마리 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그들과 동행이 되어 동굴을 이리저리 들어갔지만 마침 전등을 가지고 오지 않아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잠시 바깥에 있을 때 그들이 안으로 기어 들어가 무슨 짓을 하는지 계속 킬킬거리고 있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왠지 양가 집안의 어른들 몰래 이루어지는 청춘 로맨스를 지켜주기 위해 바깥에서 망을 봐주고 있는듯한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회암 동굴 입구


미국인들과 헤어져 시꺼먼 동굴에 도전해 보았으나 역시 손전등이 없는 관계로 더듬다가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등만 까졌다. 동굴에서 빠져나와 산 중턱에 있는, 리조트가 개발한 탐장 동굴로 향했다. 아직 한 시가 안되어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살짝 출구 쪽으로 들어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전망이 좋다. 뒤를 돌아 정자를 바라보니 아까 동굴에서 함께 다니던 미국인 둘이 어느새 올라와서 서로 만지작거리며 키들거리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굴 입구



문지기가 올라와 문을 열어주면서 입장료로 4000킵을 요구. 이 친구는 미국인들 앞에서는 알랑방구를 끼다가 내 앞에서는 얼굴 표정이 굳어진다. 

동굴은 시시하기 그지 없었다. 그저 작은 종유굴에 지나지 않았다. 멋있게 보이려고 빨간 등 파란 등을 달아 놓았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하지만 이 꼭대기까지 계단을 만들어놓은 리조트의 노력이 가상하게 여겨진다. 내려오면서 공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가 형편없어서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탄짱 동굴 꼭대기에서 바라본 왕위앙의 전경 #1. 과거 라오스의 수도였던 왕위앙은 생각외로 작은 동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위앙 전경 #2. 왕위앙 리조트의 건물과 다리가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길가에 물건 몇 가지를 내다 놓고 파는 집이 눈에 띄어 무작정 들어가서 먹을거 있으면 달라고 얘기했다. 얘기한 거나 진배없다. 대나무 잎으로 싼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건네준다. 그것하고 물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의 시원스럽게 생긴 대나무 집에 들어가 TV를 보았다. 식구가 셋, 한 아줌마는 놀러온 것 같고 넷이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얘기 하다가 웃다가 나를 의식해서 입을 다물고 TV를 보기도 했다. 성격들이 워낙 순박하다 보니 외부인을 박대하지 않는 것 같다. 믹서와 오렌지를 발견하고 이걸 여기다 갈아서 먹고 싶다,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말한 거나 진배없다. 오렌지 주스를 만들어서 얼음을 띄워 갖다 주었다. 아줌마가 라오스말로 2천킵이라고 했는데 아저씨는 단호하게 3천킵을 불렀다. 그들은 잘 모르고 있을 테지만 나는 라오스 숫자 정도는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관광객이라서 사기 당한다는 기분이 들어 씁쓸했지만 멀뚱멀뚱 모른 척 했다. 순박함은 희미해져만 가고 이들도 외국인 등쳐먹는 기쁨을, 돈 맛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30분쯤 TV 보다가 나왔다. 순 태국 방송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무작정 올라가기 시작. 길은 뜨거웠고 음료수 먹을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간간히 뚝뚝이 쌩하고 지나갔다. 튜브를 뚝뚝에 싣고 강 상류로 올라가는 서양인들이다. 상류께의 동굴 입구 근처로 가보니 방갈로를 만드는 중. 왕위앙도 사람들의 때가 타기 시작하면서 관광지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라오스에 오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2년 전 일이다. 그리고 3년 전에 값싸고 빡세게 돌아다니며 고산족을 만날 수 있다면서 라오스 여행이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3년이 지나면서 라오스 역시 차츰 관광지화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중국애들을 닮으려고 노력했는지 중국의 이중 요금제, 그러니까 중국인에게는 정상 요금을 받고, 외국인에게는 그 두 배 정도 되는 요금을 받는 체계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잘 사는 놈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믿는 북한인들처럼 순진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남한인들은 하나도 귀엽지가 않았다. 어차피 핀트가 맞지 않는다.  

자전거를 나무 그늘 아래 세워둔 채 어슬렁거리며 강을 어떻게 건널까 궁리하고 있으니까(건너편의 동굴에 가기 위해) 강 건너편에서 사공이 손을 흔든다. 그와 대화를 한 것이나 진배없다. 배를 타고 강 건너편에 다다러 그에게 어디 볼만한 동굴 없냐고 물어봤다. 그는 이때다 싶었는데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동굴이 근처에서 가장 큰 것이며 다른 동굴 가봤자 볼 것도 없다. 여긴 박쥐도 살고(팔을 흔들어 보이며) 안에 수영할 수 있는 연못도 있고(팔을 저어 보이며) 거대한 석회암 회랑이 있다(팔을 입가에 대고 소리친다).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다른 동굴에 간 여행자들은 다 바보들이다. 내가 왜 그의 영어가 0.1%쯤 섞인 라오스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쥐어준 촛불을 들고 그를 따라가니 동굴이 나타났다. 그는 동굴 안내비와 뱃삵을 요구했다. 선선히 건네주고 그를 따라 동굴로 들어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굴 입구. 동굴 속에서 찍은 사진은 카메라가 후져서 잘 나오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촛불이 자꾸 꺼진다. 바닥은 석회석 가루가 수천년(?) 동안 쌓여 습기나 동굴 내부에서 흐르는 개울에 축축하게 젖어 미끌미끌.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고 미끈거리는 진흙경사로를 더듬어 가다가 간혹 휘청거렸다. 라오스 안내인은 안되는 영어로 뭔가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조명등을 비춰 종유석을 보여주었다. 

동굴 중간에서 다른 안내인을 따라온 서양인 커플을 만났다. 내 안내인은 나를 그들의 안내인에게 인계하고 입구로 돌아갔다. 여자애가 자길 여자 취급한다고 남자친구에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별 걱정을 다 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동굴 중간에는 수영할만한 장소가 있었다. 안내인은 동굴에 박쥐가 많다고 했지만 푸드득 날아올라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박쥐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박쥐 한 마리 조차 보이지 않아 박쥐는 어디 갔냐고 물으니까(관광객이 싫어서 떠난 건 아닐까?) 기가 죽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등 뒤로 따라오면서 찍찍 찍찍 박쥐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간혹, 피 빠는 소리도 냈다. 왠지 안내인이 불쌍해 보였다. 

적당치 않은 신발 때문에 고생했지만 여자애 뒤를 따라 다니며 여자애가 가는 길을 조명으로 밝혀주던 남자애는 나보다 고생이 더 심했다. 뒤에서 바위 접치는 소리가 나면 그 친구가 엎어진 것이다. 곧 이어, shit! god damn!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오면 안내인과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기다렸다.   

박쥐 울음 소리를 내며 내 뒤를 따라오던 안내인이(어... 근데 왜 안내인이 나를 따라온 거지? 내가 그를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장난기가 돌았는지 자신의 전등과 내 촛불을 껐다. 우리는 바위 뒤에 도사린 채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 보았다. 촛농이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비추는 불빛이 어지럽게 동굴벽을 기어갔다. 그리고 우리 쪽을 향해 전등이 비추었을 때, 나는 한껏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내인은 박쥐 소리를 냈다. 여자애 취급 받았던 여자애는 울먹울먹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애는 여전히 뒤에서 자빠지며 쉿! 댐!을 외치고 있었다. 전형적이라 장난에 흥미를 잃었다.  

강을 건너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도시라고 부르기는 뭣했다. 집 앞에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오후 1시 조금 넘어 숙소 앞 식당에서 두부 볶음밥을 시켜 먹었다. 어젯밤에 볼 때는 몰랐는데 베지타리안 식당이다. 식당 이름은 End of the World 였다. 식당 이름을 보다가, 세계여행을 꼭 가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굳혔다. 두부 볶음밥을 맛있게 먹다보니 황태자가 숙소에서 나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어젯밤 먹은 술 때문에 숙취로 고생한 것 같다.   

숙소 주인집 할머니와 아가랑 놀다가 잠시 낮잠을 잤다. 옆 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스르르 잠들었나 보다.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 앉았다. 똠얌을 먹고 싶단다. 그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으나 많이 실망한 듯. 식당 주인은 술에 취해서 주문 받는 것을 잊어 먹었다.   

외국인들이 바글대는 생맥주집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인도에서 장기체류한 탓에 몰골이 꾀죄죄한 일본인을 만났다. 녀석은 떨만 빨다 왔는지 헤롱헤롱 거리며 일행 중에 유독 여자에게 집적대었다. 황태자가 왠일인지 나서서 그 친구를 상대했고 일본애는 흥미를 잃었는지 입을 닫았다.   

내가 술을 산다고 그랬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숙소에 들러 돈을 가져왔다. 맥주집에 죽치고 앉아 있는데 황태자가 안 왔다. 함께 왔는데, 잠시 한눈 팔다가 길을 잃은 듯. 술 먹으면서 사람들 신원 파악. 한 여자애는 가고 맥주가 다 떨어졌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마시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인장에게 내일 떠난다고 말하니 오늘 저녁에 지불해 달라고 한다. 아가와 할머니랑 놀았다. 아가에게 지구본을 돌려가며 지명을 가르쳐 주었다. 할머니는 뭐가 좋은지 내 얼굴만 보면 낄낄낄낄 웃었다. 한쪽 눈은 실명했고 꼬부랑 허리에 거미같은 손으로 정원에서 꽃을 따다가 빨간 꽃과 노란꽃 무더기를 만들어 내게 건네 주었다. 나는 그 꽃을 들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여자가 준 꽃이다. 한국에서는 생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꽃을 받은 적이 있었다.   

왕위앙 레스토랑 근처를 돌아다녔다.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알아보았다. 숙소로 돌아와보니 숙소 앞 탁자에 한국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내 가이드북을 보여 주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위앙에서 만난 세 한국인 여성. 다들 베트남에서 만나서 라오스까지 정처없이 흘러왔다. 내가 찍은 것은 아니고, 내 카메라로 서로서로 찍었다.

남은 사람들은 알아서 하기로 하고 황태자와 나는 tube를 빌리러 가게에 갔다. 툭툭을 타고 5-6km 상류로 올라가 튜브를 타고 내려오니 기분이 끝내줬다. 백조처럼 우아하게 신발짝으로 노를 지었다. 하늘에는 해가 떠 있었고 강물은 천천히 흘러간다. 이렇게 뻔한 일들이 낭만적인 기쁨이 되다니... 자다 깨다 하면서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갔다. 책을 안 가져온 것이 후회된다. 담배도 없었고 모자도 없었다. 약간의 돈을 들고 왔더라면 중간 중간 동굴에 들러 휘적휘적 돌아볼 수도 있을텐데... 실수다.   

홀랜드나 더치로 보이는 여자 5명으로 이루어진 시끌벅적한 팀을 만났다. 황태자는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물에 떠내려오는 속도가 서로 차이가 있었고, 나는 틈틈이 백조처럼 우아하게 신발짝으로 노를 저어 나아갔다. 여자애들과 어쩌다 경쟁이 붙었는데, 나를 이겨보려고 시끄러운 오리들처럼 법석을 부렸다. 난 우아해야 하므로 천천히 노저어갔다.   

3 시간쯤 걸려 내려오니 다리 앞에서 통행세를 받고 있었다. 젖은 옷가지를 흔들며 돈 없다고 개겼다. 그들끼리 수군거렸다. 서로에게 돈이 없다는데 어쩌지? 하는 표정들이다. 정말 재밌게도 순진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담배 한 대 달라고 하니 한 친구가 뛰어갔다. 그는 다리를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한 개피를 건네주었다. 황태자가 떠내려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간신히 껍데기가 벗겨지기 시작한 살이 하루종일 햇볕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탔다.   

그들이 라오라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관심있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라오스어로 뭐라고 말한다. 마시겠냐고 묻는 것 같아 고개를 끄떡이자 다리에 앉아 있던 현지인 셋이서 술을 주느냐 마느냐로 싸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대낮부터 무슨 술을 마시냐고 싸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중, 술병을 가로채 완강하게 버티던 한 노인네가 술병을 잡고 안 놔주길래 술 먹긴 글렀다 싶었는데 그 노인네가 지저분한 컵을 한켠에서 꺼내더니 손수 술을 따라 내게 한 잔 건넸다. 완샷했다.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45도 짜리 술을 완샷 했다. 현지인들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알딸딸한게 기분 정말 좋다. 현지인들끼리 한 잔씩 돌리다가 내게 다시 한 잔 따라 주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홀짝홀짝 마셨다.   

용기를 얻은 현지인들은 다리를 지나가는 외국인들에게도 권해 주었으나 다들 거절했다. 내가 나서서 한 잔 마셔보라고 했지만 마시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내가 마셨다. 황태자가 안 오길래 떠나려 하니 내일 또 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통행세도 안 내고 담배 한 개피와 술 넉 잔을 공짜로 얻어 먹었다. 전날 오렌지 주스 먹고 오버차징하는 라오스인에게 느꼈던 불쾌한 기분이 깨끗이 날아갔다.   

튜브를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니 튜브를 어깨에 건 채 황태자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왜 걸어오냐고 물으니 저녁 때가 가까워지니까 물이 차가워서 잠이 깨어 중간에 걸어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시장통에 쭈그리고 앉아 정체불명의 면류를 먹었다. 여기서 먹는 음식은 재료가 미스테리였다. 프랑스 여자 둘이 짹짹거리며 노판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맛있는 것이니 먹어보라고 권했다. 안 먹고 개긴다. 그중 모험심이 강한 한 처자가 하나 먹어보더니 묘한 표정을 짓고는 친구의 손을 잡고 슬금슬금 사라졌다.   

숙소에서 샤워하고 나서 술 먹으려고 한국인 여자들을 찾아 돌아 다녔다. 서양애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 보이는 우리 동양인 남자들을 길가의 널린 돌맹이 쳐다보듯 하기 일쑤였다. 내가 말을 걸기 전에는 그쪽에서 말을 거는 일이 없었고, 동양인에게 두려움이라도 느끼는지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면 내 인상이 드러워서 그런 것일까? 여자들을 찾지 못해 우리 끼리 어제 갔던 바로 갔다. 생맥주가 떨어졌단다. 병 맥주 두 병 마시고 인류학의 장래에 관해, 인문학의 위기에 관해 떠들었다. 맨정신인 대낮에는 먹고 살기 바빠서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맥주가 모자라 더 시키려니 병 맥주도 다 떨어졌단다. 술집에서 술이 떨어졌다니? 아무래도 우릴 내 쫓으려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바에 동양인은 우리 둘 밖에 없었고 어젯밤에도 비슷한 냉대를 당한 기억이 났다.   

돌아 오는 길에 여자애 하나를 만나 숙소 앞 레스토랑에 앉아 뭔가 먹는 동안 황태자가 먹다남은 라오라오를 가져와 박쥐 고기를 안주 삼아 마시는데 다른 일행이 도착. 라오라오를 맥주에 섞어 들이키면서 박쥐 고기를 먹으니 맛이 그럴듯 하다.   

숙소에 돌아와 자려고 하는데 한국인 일행이 시장에 가서 따끈한 맨밥을 사왔다. 마침 출출하던 참에 잘 되었다 싶어 거기에 고추장을 비벼먹으니 맛이 끝내준다. 한국에 있을 때는 줘도 안 먹는 고추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일행중 내일 나와 함께 위앙짱으로 돌아가기로 한 여자애에게 5:30am에 깨워달라고 부탁하고, 가이드북을 한국인 중 한 명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에 가이드북에 적힌 버스 번호를 옮겨적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5:30am, 도대체 여행할 때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뭘 해도 별로 안 피곤하고 건강하기만 한 것일까? 충분한 햇빛으로 합성된 비타민D 때문일까? 샤워하고 숙소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짐을 싸고(시간이 좀 걸렸다) 인사하고 나갈 때쯤이 6:05am, 버스 정류장에 나가보니 마침 버스가 도착해 있다.   

남는 자리가 없어 각기 떨어져서 비좁은 좌석에 끼워타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10시쯤 위앙짱에 도착. 지금 국경을 넘어봤자 태국에서 저녁 때까지 할일 없이 방콕행 버스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구경이나 더 하다 가기로 했다. 마침 동행은 위앙짱 구경을 못해 보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삐끼가 환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에게 국경까지 얼마냐고 물으니 3만킵을 달란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웃기고 자빠졌네 하고 돌아서니까 가격이 차츰 떨어지기 시작했다. 2만킵쯤 떨어졌을 때 우리 관광 좀 하고 돌아와서 네 차를 타겠다고 말했다. 삐끼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환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스테이션 앞의 식당에서 간단히 국수로 식사, 도시라기 보다는 마을에 가까웠던 왕위앙에 있다가 돌아와서 인지 문명세계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닭들이 날뛰는 식당 뒷켠에 짐을 잠시 맡기고 독립문 꼭대기로 올라갔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독립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짓다만 콘크리트 건물이다. 처량하기 짝이 없다. 라오스 최고의 번화가에 있는 신호등들은 '절전'을 목적으로 여전히 꺼져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립문 내부의 선물가게. 심심해 보이는 아이.


은행을 찾아 달러를 baht로 환전. 20 달러만 했다. 환율이 매우 형편없다. 가이드북을 뒤져 사원을 찾아 보았다. 이미 볼품 없다는 말은 들은 바 있다. 1:00pm에 문을 연다고 적혀 있다. 지나가는 중들과 놀았다. 의외로 영어를 잘 하는 친구가 있어서 대화에 그다지 지장은 없었다. 뭔가 철학적인 주제로 얘기해 볼까 골똘히 궁리해 보았으나 불교에 관련된 단어가 마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들이 나뭇 그늘에 앉아 우리를 빤히 쳐다보길래 애들과 놀아 주었다. 여자애가 애들 음식을 뺏어 먹으려다가 실패했다. 난 가이드북을 꺼내 사진들을 보여주며 살짝살짝 구슬려 껌과 과자를 뺏어 먹었다. 꿀맛이었다.
 
화장실에 들러 속을 비우고 시간이 되어 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면서 라오스의 불상 사이를 거닐었다. 사팔뜨기 부처들이 많았고 부처에게 선글래스를 끼우고 사진을 찍어보자는 둥, 부처와 하이 파이브를 하는 등...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옷 입은 모양으로 보아서는, 라오스의 있어 보이는 집안 아이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님과 한 컷. 계급은 높은 것 같은데 영어는 잘 못했다. 꽤 점잖은 양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들이 여자와는 사진을 안 찍는다는 통념 때문에 여자애가 바짝 얼어 예의를 지키려는지 선글라스를 벗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회랑에 늘어선 불상들... 매우 희안하게 생겼다. 대부분 사팔뜨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원 내부 정경. 한국의 절간만큼 단아하고 넉넉해 보인다. 태국의 사원처럼 화려해서 왠지 볼썽 사납지도 않다. 금칠한 부처만큼 보기 싫은 것도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팔이 잘린 보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살과 하이파이브?

 
천천히 걸어서 터미널로 귀환. 배나 채울까 하다가 시장에서 사기당했다. 음료 두 잔을 시켜먹고 일어서려니 8000킵을 달란다. 그럼 한 잔에 4000킵? 죽여주는군. 얼빠진 표정으로 고스란히 지불하고 속을 채운 바게뜨 두 개를 사고, 식당에서 닭들을 헤치고 배낭을 찾아와 느적느적 국경까지 타고 갈 것을 찾다보니, 아까 우리와 2만킵에 협상했던 친구가 나타났다.
 
라오스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국경 가는 길 역시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인도 생각이 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앙짱의 차분한 거리 모습


 출국할 때 20밧이나 2500킵을 달라고 한다. 그렇잖아도 음료수 먹다가 돈을 다 날려서 툭툭 기사에게 1000킵을 못줘 낭패를 당했기 때문에 눈이 홱 돌아, 왜 출국할 때 출국세를 내냐고 출국소 관리에게 악을 썼다. 그런데 그건 출국세가 아니라 셔틀버스 승차비였다. 낯 뜨거워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태국에서 라오스 올 때에도 셔틀 버스를 탔고 분명히 돈을 냈기 때문이다.   

태국에 입국, 농카이로 귀환.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16:30 차 밖에 없다. 현재 시각은 16:00. 가이드북에 나온 시간표가 틀리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나 라오스 물가를 킵으로 적어놓은 점과, 불과 일 년 만에 환율이 폭락하여 체류 비용 계산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고, 덕택에 라오스 남부로 들어가 루앙프라방을 거쳐 북부의 훼이사이를 통해 태국으로 돌아온다는 계획은 물 건너가고 만 것이다. 가이드북을 순진하게 믿은 탓이다. 그것보다는 여행자들에게 현지 정보를 수소문하지 않은 내 탓이 더 컸다.   

어쩔 수 없이 16:30 차에 올랐다. 우리야 걱정 없지만, 우리처럼 루앙프라방 행을 포기한, 왕위앙에 남아있는 한국인들은 저녁 차 시간으로 알고 느적느적 오다가 차를 놓칠 염려가 있어 걱정된다. 차 안이 널널해서 각기 널찍하니 한 칸씩 차지하고 다리 뻗고 잘 수 있었다. 옆자리에 여자애가 앉아 있으면 졸다가 기대기 때문에 불편하다.  

새벽 5:30am, 방콕 북북 터미널에 도착. 짹짹거리는 택시기사들을 뿌리치고 대신 그들에게 시내버스 터미널 위치를 물어 첫 차로 방콕 시내로 갈 예정. 여자애가 네스티와 커피가 섞인 야릇한 음료를 가져와 나눠 먹었다.  

카오산에 도착하니 6:30am, 만남의 광장에 슬쩍 짐을 올려놓고 거리를 헤메다가 본의아니게 죽 한 그릇 먹었다. 오렌지 쥬스를 달랬더니 죽과 오렌지 쥬스를 가져다 주었다.
 
메일을 확인하러 인터넷 까페에 들렀다. 농카이-방콕 행 시간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왕위앙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알려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에어컨 클래스 2였고, VIP나 에어컨 클래스 1은 버스 터미널에서 찾을 수 없었다.   

전화접속 네트워킹을 사용하는 인터넷 카페의 컴퓨터들은 hotmail.com에 접속이 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메일을 사용하려던 외국인들이 우두커니 컴퓨터 앞에 앉아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난 내 홈페이지로 들어가 내 컴퓨터의 ip address를 알아낸 후 vnc viewer로 내 컴퓨터에 원격 접속해 집의 컴퓨터로 hotmail에 들어갔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들은 내가 핫메일을 쓰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되는 줄 알고 시도했으나 안 되지. 약 오를꺼야.  

메일을 확인했다. 3-40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그중 회사 동료의 메일을 열었다. 투자 유치에 실패했고, 기한을 넘겼으니 이제 일을 접자,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별로 씁쓸하거나 기분 나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울에 돌아가면 땡전 한푼 없는 알거지가 되지만 그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뒷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하고 일단 여행을 왔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고 즐기기로 했다. 여기와서야 건강을 되찾았다. 그동안 찌들었던 머리통은 오직 여행이라는 목적 한 가지 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사실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일정이나 계획이 도중에 사라졌기 때문에 그냥 떠돌아다니는 것 이상은 되지 않았다. 지출과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고 절약을 한다던가, 시간을 잘 맞춘다거나, 아니면 관광지를 요소요소 돌아다니며 구경하지도 않았다. 그저 할 일이 정 없으면 움직이는 식이랄까?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마음이 편하고, 건강상태가 지극히 좋은 것 같다.   

여자애는 오늘 만남의 광장에서 자기 친구를 만나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 여행 일정은 40일 정도인데 여행경비로 1000$쯤 준비한 것 같다. 그중 500$이 남았고, 그중 일부를 환전하여 짜두짝 시장이나 기타 백화점에 들러 엄마 속옷이라도 사줄 생각인 것 같다. 그녀에게 이것 저것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 국제 전화는 잘 안되었고, 환전은 카오산에 널려 있는 은행 출장소/환전소에서 했다. 싸얌 스퀘어로 가는 버스 번호와 버스 정거장을 가르쳐 주고 헤어졌다. 돌아가면 서울에서 만나 술 한 잔 하기로 약속했다.   

오후 한 시,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30분에 150밧, 전통 맛사지 대신 오일 맛사지를 택했다. 맛사지사가 등짝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힘을 주어 문지르자 새까맣게 탔던 살거풀이 죽죽 벗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30분 동안 나는 맛사지사를 때밀이로 고용한 셈이다. 맛사지를 마치니까 기분이 상쾌했다. 희안한 일은 그렇게 꾹꾹 눌러대는 맛사지를 하는 동안 뼈 마디 중에 우두둑 소리 나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는 점.   

카오산의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목걸이 줄을 만들어줄만한 곳을 찾아 다녔다. 마침 가죽 제품을 파는 곳에서 가느다란 끈을 발견하고 그에게 목걸이를 내놓고 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 목걸이 모양 때문에 낄낄 거렸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목걸이가 되었다.   

만남의 광장에 들러 짐을 찾아 슬쩍 빠져 나왔다. 미안한 기분 탓에 100밧 정도나 되는 한국 음식을 시켜 먹기도 했지만 이미 두 번을 그렇게 하니 차라리 하룻밤 자는 것이 나을 듯. 다음부터는 짐 보관소에 짐을 맡겨야 하겠다.   

복권청 앞에서 파인애플을 사서 우걱우걱 먹고 있으니 반쯤은 거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옷차림도 그렇고 앞뒤를 훌터보면 사실 무척 없어보였다. 59번 에어컨 버스가 자나간다.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차도로 맹렬하게 뛰어나가 버스를 가로막듯이 세운 후 기어 올라갔다. 그러니까 왠지 더 거지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탈리아 놈으로 보이는 녀석이 자꾸 짜두짝 시장이 어디냐고 버스간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앞에 앉아 있는 곱상하게 생긴 태국 태생 중국 청년은 겉모습만 얼핏 봐서는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다. 태국도 태국인과 중국인의 소득격차가 심하게 나는 것 같았다. 나와 피부색이 같은 중국인 부류는 대게 돈이 많고 까무잡잡하고 느긋한 태국인들은 돈은 없지만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것 같다.   

차장에게 공항이 다음 정거장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내리니까 허허벌판. 다음 정거장이 아니라 다음 다음 정거장이었다. 가르쳐주려면 똑바로 가르쳐 줄 것이지. 혹시, 내가 묻는 방법이 잘못된 것일까? 빌어먹을. 살타는 소리가 심하게 들려온다. 공항 터미널 3층으로 올라가 보딩패스를 얻으려고 하니 컨펌이 아직 안되었단다. 다시 데스크에서 확인해 보니 컨펌이 된 상태. 엿먹을 놈, 깜짝 놀랐잖아. 남은 동전으로 구아바 주스와 빵을 사들고 출국장에서 대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돈 무앙 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에서 바라본 방콕 외곽지의 모습

"As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TAG
한국은 여전히 열혈냄비촌 같았다. 국적이 신통치 않아 자신이 트로피컬 프룻 칵테일같다는 기분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타이가면 타이 사람이고, 라오스 갔더니 라오스인이고 말레이인 취급도 당해보고 싱가폴에서는 차이니스 대접을 받았다. 오직 한국에서만 한국인 취급을 안해들 주셨다. 심지어 솜바디는 나를 외계인 취급했다. 별로 간 데도 없는데 경비만 오지게 깨졌다. 방콕, 푸켓, 위앙짱, 왕위앙, 쿠알라룸푸르, 카메론 하이랜드, 이포, 타이핑, 쿠알라 캉사르, 멜라카, 싱가폴, 기타 이름없는, 혹은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몇몇 깡촌들을 섭렵하고 20일 동안 나태하고 게으른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다. 

42만원짜리 싸구려 항공 티켓으로 비행기 다섯번 갈아 타 봤고, (서울-오사카, 오사카-방콕, 방콕-쿠알라 룸푸르(이하 KL), 싱가폴-오사카, 오사카-서울) 그보다 싼 38만원짜리 티켓을 놓쳐서 후회했다. 

경비는 하루 평균 15000원씩 20일 정도, 그러니까 30만원 정도 되고 술값이나 비자 발행 덕택에 +12만원 더 들어갔는데 이 정도면 가히 황태자급 생활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태국에서는 하루 평균 15000원, 말레이지아에서는 2만원, 싱가폴에서는 3만원을 계산했는데 역시나 술값 때문에 추가 경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다. 

디지탈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삼성의 SDC-80. 14만원짜리 중고로 구입하여 그동안 유용하게 사용하던 것. 4MB로 30장 가량을 찍을 수 있다. 용산에서 3-4만원 주고 32MB짜리 MMC 를 하나 더 장만했고 덕택에 200여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작은 충전기를 들고 다녔지만 충전할 수 있는 컨센트가 있는 곳이 드물어 오히려 애를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PDA에 Bangkok과 Singapore City Guide를 설치. 그렇게 크게 유용하지는 않았다. 가끔 밤에 싼 레스토랑을 찾아보는 것 외에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으니까. 손목에는 시계를 찼다. 전지가 들어가는 것들은 이렇게 셋이었다. 이런 저런 한글을 쓸 수 있는 180MB 분량의 싱글판 크기 CD도 들고 갔다. 인터넷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별달리 쓸모를 느끼지는 않았다. 여행 내내 email을 확인만 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썩을만한 음식들은 빼내어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냉장고는 내 검소한 두뇌처럼 들은 것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컴퓨터의 전원을 제외한 전기 용품들을 모두 껐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 놓고 가서 다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저러다가 꺼질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난 3개월간 한번도 정전된 일이 없으니, 믿기로 했다. 

삼성역 근처의 외환은행에서 환전을 했다. 빳빳한 백 달러 짜리 지폐 두 장과 50달러, 20달러 두 장, 10달러 한장. 경비가 모자라면 카드를 사용하기로 했다. 근처 서점에 들러 헬로 타일랜드 북부 편을 샀다. 배낭에는 티셔츠 두 벌과 수영팬티(팬티 대용으로 요긴), 반바지, 혹시 트래킹하다가 필요할 지 몰라 챙긴 침낭, 안티 모스키토 스프레이, 선 블럭 크림, 타월, 룽기, 가이드 북 두 권, 세면도구 약간, 아스피린과 두통약, 보조가방 하나, 디지탈 카메라, PDA, 기타 잡동사니들을 허술하게 쑤셔 넣었다. 짐은 얼마 안 되었지만 배낭이 원래 좀 무거웠다. 오사카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긴 바지를 입고, 긴 팔 면 셔츠 한 벌과 오버복을 그 위에 걸쳤다. 이것들이 여행중 짐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방콕 인, 싱가폴 아웃이라 겨울옷만 갈무리해 보관해 두기도 마땅치 않다. 걸리적거린다. 

그것도 몇 번 들락거리니까, 김포 공항이 낯설지 않았다. 인천 신공항 안내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남은 돈으로 가장 싼 여행자 보험을 들었다. 11000원. 인터넷으로 들었더라면 6-7000원이면 되는 것. 공항 사정으로 비행기가 약간 늦게 출발했다. 난바행 막차가 몇 시냐고 묻는 한국인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생각해보니 저번에는 배낭을 짐으로 부쳐 오사카 공항을 빠져나와 난바 역까지 간 우스운 일이 있었다.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 여행경비의 거진 절반을 까 먹고 호텔 가격이 너무 비싸 결국 공원 한 복판에서 거지들과 함께 박스 깔고 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시장통에서 먹은 라면이 참 맛있었지. 그때 자판기에서 뽑아든 럭키 스트라익 담배 한 개피도 맛이 있었지. 그때, 잠시 부슬비가 내렸지. 
 
-*-
 
오사카 공항에 도착, 단 한번 밖에 온 적이 없음에도 무척 낯이 익다. 아니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immigration 앞에서 한국인 셋을 만났다. 트랜짓을 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그저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관리들의 양해를 구하고 Immigration 창구의 옆으로 빠져나와 트랜짓하는 작은 출입구로 들어갔다. 그들이 따라왔다. 한국인 중 하나는 괌에 일주일 예정으로 가는 중이다. 마감에 쫓겨 3일을 까먹고 가자마자 간신히 이틀 정도 지낼 수 있는 형편이란다. 그것도 호텔에 짱박혀 노트북을 두들기게 될 것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스크립트 작가?   

술만큼은 안 먹겠노라고 결심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트랜짓 하려고 밤에 덜덜 떨고 있는데 커다란 더플 백을 들고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가방 무게가 장난이 아니라서 뭐가 들었냐고 물었다. 자신의 선배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말레이지아로 날아가고 있다고 말하던 이 친구는 4홉 들이 소주 일곱 병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본 순사가 지켜보고 있었지만, 의무감에서 하는 수 없이 병을 깠다.
 
중국에 갔다 온 적이 있는 친구다. 계림 여자들이 예쁘지 않냐고 하니까 소주가 진짜란다. 가을에 중국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비자 만료로 쫓겨난 어떤 아저씨가 합류했다. 그는 회사내에서 권력투쟁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병 마시고 알딸딸해 있는데 우리를 지켜보시던 일본 순사분께서는 패스포트 검사를 요청하셨다. 패스포트는 남에게 함부로 건네줘서는 절대 안되는 물건이다. 우린 고성방가도 안 했고 노래도 안 불렀으며 단지 물을 마시고 있었을 뿐이다. 순사 양반, 보시오. 이 투명한 '미네랄' 워터를! 그렇게 마셨다.
 
의자에 드러누워 잠자는 동안 공항 내부 시설의 보수 공사 때문에 사방이 시끄러웠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침을 흘리고 자다가 깨었을 것이 분명한 의자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침.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간밤에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화장실에서 이빨 닦고 세수한 후, 히죽 웃었다. 보딩 패쓰를 얻기 위해 ANA desk에서 전화를 걸어보니 게이트 앞에서 준단다.
 
비행기를 탔다. 술이 덜 깨 속이 아프다. 공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리라. 죽어라고 일본어로만 지껄이는 스튜어디스에게, 죽어라고 영어로 물만 시켜 먹었다. 4시간 동안의 지루한 비행. 이코노믹 클래스 신드롬이라던가? 그런 정신 병리 현상이 생각났다.
 
창 밖의 구름을 쳐다보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애니들을 생각했다. 구름은 비좁은 섬의 답답함을 벗어난 자유다(아마도).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이렇게 옴짝 달짝 좌석에 들러붙어 앉아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을 참는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에서 올 때 옆 사람이 다 본 신문을 가져온 것이 있는데(신문지는 탁월한 보온 효과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모포가 없을 때는 신문지가 그만) 읽다보니 한 광고가 눈에 띄었다. 서울문화사에서 DK(도링 앤 킨슬리?) 출판사의 가이드북이 한국 번역판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보았다. DK 출판사라면 illustrated sf encyclopedia를 팔아먹는 곳인데 박상준님 번역은 잘되가는지. dk의 가이드북이 나오면 한국의 유럽 여행 가이드북들은 수줍은 나머지 자살하게 될 것 같다.
 
내가 본 신문은 한국 4대 일간지(스포츠 서울, 일간 스포츠, 스포츠 조선, 스포츠 투데이)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정확한 루머를 생명으로 한국 최고의 신문임을 자처하는 '일요신문'이다. 일요신문을 보면 남보다 적어도 2개월은 앞서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신문들은 늘상 일요신문에서는 가볍게 다루는 시시한 가십꺼리 하나로 특종이라도 낸 것처럼 뒷북을 친다고 하더라.   

한심한 ANA의 기내식에 기분이 편찮아서 비행기로 지나가다가 내려본 거대한 정글 평원 한복판을 군달리니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흘러가고 있는 메콩강을 바라보며 저 강을 건너갈 것이다. 라고 다짐했다. 비행기의 속도와 경과시간으로 보건대(시속 900~1000kmh로 고도 15000m에서 항행중) 저건 분명 동남 아시아를 술취한 놈의 걸음걸이처럼 가로 지르는 메콩강이다. 가이드북을 펼쳐 보았다. 덮었다. 빙고. 맞았다. 고독한 여행자의 유일한 벗, 가이드북. 그 정확한 정보가 생명이기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 쯤은 읽어보게 되는 성서같은 책.   
16:00, 방콕의 돈 무앙 공항에 도착. 입출국 카드가 비치되어 있지 않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안내양(?)에게 한장 얻어 쓱쓱 작성하고 길다란 줄의 말미에 섰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국에서 세웠던 모든 계획을 때려치우기로 결심했다. 태국은 건기, 가장 여행하기 좋은 시즌이라 관광객들이 떼거지로 몰려왔기 때문. 그래서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로 작정했다(거짓말). 환전소 앞에서 얼쩡 거리다가 달러를 환전하지 말고 ATM에서 뽑아쓰기로 했다. 3000 바트를 뽑아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3000바트의 카드 수수료가 무려 450바트나 되었다.  

공항 청사를 빠져 나오자 마자 소름끼치게 확 덥치는 강렬한 열기, 그 앞을 쌩쌩 지나가는 차들을 보면서, 다시 왔구나, 이번엔 쉬러 왔다. 라고 중얼거렸다. 아무 것도 낯선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3.5밧 짜리 에어컨도 안 들어오는 싸구려 버스보다는 그래도 멋지게 한번 방람푸로 진입해 보자는 생각으로 거금 100밧짜리 에어컨 버스에 올랐다. 제작년 고경환과 함께 한밤중에 방콕에 도착하여 벙쩌서 택시 기사한테 사기 당한 넝마같은 추억이 떠올랐다. 들르는 게스트 하우스마다 빈 방이 없어서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에 홍익인간과 만남의 광장 문을 두들기며 문 좀 열어달라고 불쌍하게 소리지르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기분이 씁쓸했다. 7 eleven에서 컵라면을 사 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그 괴상한 맛이 나는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모기에 물리면서, 거지같은 행색으로 거리를 떠돌았다. 그때도, 쉬러 왔다! 라고 주장하긴 했다. 방콕 시내의 악명 높은 교통 체증 탓에 2시간이 걸려서야 카오산에 다다랐다.   

친근한 카오산 여행자 거리, 어쩐지 고향에 돌아온 듯한 희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기 전에 The Beach라는 영화를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보았다. 영화 장면 장면에 카오산 거리가 나오는 것을 보며 추억에 잠기던 기억이 떠올랐다. 값싼 항공권을 구할 수 있고, 위조 신분증도 만들 수 있다. 밤이면 술에 취한 파란눈과 게이들이 우글거리는